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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나뮤나 Aug 27. 2023

고래 / 천명관

KOR FIC CHEON MYEONG

살기 위해 1000일 밤 이야기를 지어냈던 여인의 이야기, 천일야화가 떠오른 소설. 일화, 여행담, 연애담, 우화, 코메디, 로맨스, 야설, 판타지등 모든 장르를 압축적으로 담아 낸 이야기. 어쩜 이렇게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게 쓸 수 있을까,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되는 이야기 종합 선물 세트.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도저히 셰에라자드를 죽일 수 없었다던 왕의 심정을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쩜 이렇게 "말뽄새"가 약장수같고 사기꾼같고 세상에 둘도 없는 뻥장군 같은데, 무시가 안되고, 자꾸 궁금해지고, 호랑이 담배피던 옛날 얘기처럼 말이 안되는데 뒷 이야기를 안듣고는 못배기겠고. 이런 소설이 다 있냐. 나에겐 2023년 최고의 소설이다.


고래는 2004년에 출간되었으니, 벌써 얼추 스무살이 되어가는 소설이다. 읽을 기회는 많았지만 몇년 전 천명관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읽고 무척 실망한 후, 고래에 쏟아지는 찬사도 부풀려졌을 것이다 단정짓고 읽지 않았다.


고래를 읽고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떠올려보니 나는 괴상한 관점에서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읽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도대체 이 괴기스런 소설은 무엇인가 했던 것처럼. 도대체 이게 왜 걸작이라는 것인가 하고 몇년을 의아해 했던 것처럼.


사족을 붙이자면 내가 "대성당"에서 괴기스럽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레이먼드 카버의 조크였고 유머였는데, 대작이라는 평가만 듣고 예의 그렇듯 책을 심각하게만 읽느라 웃을 자리에서 웃지 못하고 가벼워져야 할 곳에서 가벼워지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말도 안되는 무게감으로 유머를 읽어내려간 덕에 책의 전체적 느낌이 뒤틀렸고, 그 결과 "대성당"은 내게 괴기스러움만 남기는 이상한 소설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 나는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도 "대성당"을 읽을 때같은 마음가짐으로 읽었을텐데, 그래서 천명관이 던지는 유머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비장한(?) 마음가짐은 작품에 대한 실망으로 또 그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는 선택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달짝 달짝 거리는 마음, 허구를 허구로 받아들이 수 있는 여유, 심각과 폭소(爆笑) 사이에게 속도감있게 줄을 탈 수 있는 균형감, 그리고 독자의 상상력


천명관의 고래를 읽기 위해서는 달짝 달짝 거리는 마음과 허구를 허구로 받아들이 수 있는 여유, 심각과 폭소(爆笑) 사이에게 속도감있게 줄을 탈 수 있는 균형감,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를 완성시킬 수 있는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무살이나 되어가는 이 소설이 지금에서야 내 손에 잡힌 것 같다. 지금이나 되니까 이 소설을 어떤 방식으로든 즐길 수 있게 되어서.


올해 고래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날부분 최종후보(shortlist, 월드컵으로 하면 무려 4강이다!) 에 올랐었다. 해리포터의 나라 영국에서 이 화려한 한국의 판타지 소설이 당연히 winner가 될 줄 알고 이제나 저제나 발표날만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Georgi Gospodinov의 Time Shelterd의 수상 소식은 마음아픈 일이었다.  


정말 재밌다. 작가보다 "꾼"이라는 접미사 더 잘 어울릴것 같은 천명관, 이야기꾼. 그 이야기꾼의 걸작 소설 고래. 꼭 읽어보자. 픽션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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