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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Min 민윤정 Oct 14. 2018

차별, 편견은 자연스러운 것

소수자, 마이너리티로 산다는 것과 Diversity 에 대해서

우리 나라 만큼 다름(Diversity) 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데 익숙치 않은 나라도 드물 것 같다. 최근 우리 딸이 sexual diversity, LGBT movement 에 관심이 많다. 성적 취향 뿐 아니라, 그 간 커리어를 통해 내가 느꼈던 차별과 편견은 뭐가 있을까? 를 생각하다가, 마침 공항에서 비행기 기다리다가 좀 시간이 남아서 좀 적어보려고 한다.


대학에서


대학에서 나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입학할 때는 전자계산학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컴퓨터 공학이 되어 있던 기억. 입학해보니 총원은 약 60명 이 중 여성 동기생들은 6-7 정도였던 것 같다. 10% 가량이었으니, 정확치는 않지만 적은 수였고, 착했던 우리 남성 동기들은 늘 상당히 매너있게 챙겨줬던 기억이 있다. 여성 동기들은 똑똑하고 재능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소수(Minority) 라는 게 그렇게 나쁜 기억은 아니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난 학보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었는데, 우리 학번때 최초 남성 문화부장이 나왔고 난 취재부장, 내 여자동기는 학술부장이었다. 일부 남성 선배들이 가능하겠냐? 는 반응이 있었지만, -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이 상당히 치열한 시기라 물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취재부장, 학술부장은 남성이 더 적합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 아무튼 당시 나와 내 주변 동기들은 상당히 진보적이었고, 편견에는 상당히 전투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졸업을 하고 당시 스타트업이던 Daum 에 입사하면서도 당시 핵심 멤버중에도 여성이 많았다. 창업자들은 남성이었지만 창업멤버로 기획을 이끌고 주요 포지션을 담당하던 쎈 언니들이 많았던 조직이라 여성이어서 어렵다기 보다는 빠르게 변하는 기술이나 트랜드를 따라가는게 늘 바쁘던 시절이었다.


지방대


하지만 간혹, 서울 Y대학 출신이 유난히 많았던 전 직장에서 지방대 출신이었던 난, 소외감을 느끼거나 피해의식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좋은 프로그래머 구하기는 힘든 시절이었고(난 좋은 프로그래머였고), 또 난 그 Y모 대학 졸업하고 그 회사 초창기 멤버인 남편과 연애 후 결혼도 했기 때문에 그 시기가 길진 않았다. 오히려 초창기 선배의 꼬임으로 고생을 더 많이 했던 그 대학 그 학과 출신의 그룹과는 지금도 친하고, 혹시 새로운 멤버들이 소외감을 느낄까, 그 멤버들은 정기모임도 몰래 하곤 했었던 기억이 있다. 난 지금도 ** 대학 출신보다는 ** 전공, Git repo, 해왔던 일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방대라고 통칭되는 대학 출신들은 공감하겠지만 업계에서 형, 언니, 선배 이렇게 접근 할 수 있는 인맥이 적으면, 이 사회에서 사업을 하거나 소개를 받거나 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틈새광고 : 지방대나 비전공자라도 code나 알고리즘에 자신있다면 내게 DM 을. 코딩 테스트는 하겠지만 소개해 줄 곳들이 거짓말 좀 보태서 2만군데는 있다.


성평등 이슈


아무튼 회사가 커지니 전혀 다른 조직 출신들이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고 충격적인 일들을 더 많이 겪었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회사에서 최초로 성희롱 발생건이 생겼을 때 난 진상조사위원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결론은 대상 남성 상사는 징계 및 해고가 되었고 피해 여성 부하직원은 팀을 옮겨 상당히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이 때 내가 충격을 받은 내용은 워낙 이런 사안이 당사자들간 일이기 때문에 다른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동료들의 무관심 혹은 ‘A 의 행동은 잘못이지만 B 도 문제는 있었다’,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고 A가 진짜 B 를 좋아한 것 같은데 B 가 좀 오버 반응하는 것 아닌가?’ 등등. 아무튼 난 최대한 회사의 리스크 - 해당 여성이 외부 언론이나 사법당국에 고소 고발하여 회사의 브랜드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점 - 을 강조해서 해당 판결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와서 말이지만 해당 여성 사원에겐 더 당당하게 항의 요구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나도 같은 여성으로서, 만약 불합리한 판단이 나오면 외부에 알리겠다고 생각도 했었더랬다. 아무튼 해당 판결은 잘 처리되었고 그 여성 사원도 옮긴 부서에서 잘 적응해서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 후에도 종종 이런 일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다 판결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몇개월 감봉에 그치거나 피해자가 회사를 그만둔다거나 하는 일들도 있었다. 최근 미투운동을 하는 여성 기사에 대해 달리는 댓글이나 가해자 가족, 동료들의 처신도 사실 10년도 더 전에 내가 겪었던 반응과 다르지 않다. 사실을 가려야겠지만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으므로 가해자의 행동은 문제가 안된다라는 식의 물타기, 논리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또 한번은 회사에서 새로 온 본부장을 소개받는 자리가 있었는데, 가볍게 인사하고 딸 아이가 있다는 얘기를 나눴을 때, “아이는 누가 키워주시나요?” + 측은 눈빛 질문을 받았다. “**님은 아이를 누가 돌봐주시나요?” 라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와이프가 일을 포기하고 쉰다고 했던가 이런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좀 찔렸던 건 우리 딸이 어릴 때, 난 또 한 명의 여성인 우리 어머니의 희생으로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 운이 좋았던 거지, 내 힘으로 육아-사회생활을 병행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초면에 대뜸 내 역량과 비전보다 아이는 누가 키우냐는 마치 과거 개그 프로의 소는 누가 키우냐는 말처럼 어이 없었다.


또 어이 없었던 일화는 동료였다가 상사도 되었던 한 남성 본부장과의 일화인데, 술자리에서, “아. 난 여자들이랑 일 못하겠어. 너무 감정적이고, 출산휴가를 닥쳐서 얘기하고, 이번에 두 명이나 결혼하고 출산휴가를 간다니까”. 눈치를 살피는 느낌은 있었지만 너도 담당부서장으로 비슷하게 느끼지 않냐? 는 뉘앙스였다. “당신 그거 전형적인 성차별적인 발언이다. 난 남성직원도 감수성이 예민한 건 봤었고, 사실 결혼 출산 휴가는 남자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응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 남성은 그리 나쁜 사람이기 보다 취중에 애로사항을 나눴을 뿐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두고 이렇게 얘기하고 평가했다거나 그게 내 부서장이었다면 비참했을 것이다.


골프, 담배, 선호에 대해


난 음주가무를 좋아하지만 대학때부터 싫었던 게 담배, 그리고 나이 들어서는 골프다. 담배는 특히 학보사 전 여성 선배, 동기들, 또 Daum 초기 쎈 언니들도 거의 다 피웠던 것 같은데, 난 그 냄새, 연기 모든 게 싫었다. 아무튼 회사생활하면서 담배톡은 난 끼기도 싫고 낄 생각도 없었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들, 심지어 루머나 특정인 뒷담화가 오간다는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인데 다 오픈해서 회의등에서 얘기하는게 아닌 커피톡, 담배톡, dm 모두 마찬가지로 변질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는 골프인데, 과거 직장에서 리더들은 반드시 골프를 쳐야 한다 이런 류의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공식 골프 모임, 행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IT 회사가 임원들도 파이썬으로 간단한 코드는 짜야 한다거나, 해외 고객 제휴가 있을 수 있으니 영어 발표를 연습해야 한다거나거나가 아니라 골프라니. 난 걸어다니면서 내 키에 비해 컨트롤하기 힘든 긴 막대기로 작은 공을 치는 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최근 우리 시부모님이나 남편이 같이 운동하기 위해 권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아무튼 그 때 나는 아니고 다른 내가 존경하는 쎈 언니(다음 초기 멤버) 가 초대모임에 공개거절 이메일을 보내면서, 그런 움직임이 사라졌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룸싸롱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이 접대하는 유흥주점에서 접대비를 써도 되냐는 논란도 기억이 난다. 한국 사회에서 시니어가 가자고 할 때 따라가서 비위 맞춰줘야만 하는 남성, 이런 일이 용납이 안되는 그 남성의 여자친구나 아내 모두 피해자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접대해서 잘 되는 비즈니스가 정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인 스타트업이나 기업의 비즈니스일까? 역시 당시 나도 반대파였지만 이사회 의장님이셨던가 최고 리더 한 분이 역시 우리는 그런 회사가 아니다로 단칼에 정리되었던 기억이 난다.


다양성에 대한 또 하나의 자각


MBA 를 난 미국에서 수강했다. 자긍심과 건강한 라이벌 의식이 넘치는 곳이었는데 처음엔 참 힘들었다. 영어를 그래도 한다고 해서 선발되서 지원했지만 English is always my second language. 또 하나는 난 그다지 소셜 스킬, EQ 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 인종 차별이라기 보다 인종 선호가 있었고, 퍼스낼리티 선호가 있었다. 그래도 몇몇 라이프타임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은 여전히 내 인생의 중요한 자산이다. 영어 때문에, 인종 때문에, 백그라운드 때문에는 어쩌면 핑게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의 소셜라이징 모임에서 느끼는 공허함이나 해외 모임에서 느끼는 공허함이나 마찬가지니까. 전 세계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다보니 다름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넓어질 수 있었다. 우리 클래스는 특히 각 종 다름을 수용하고 혁신으로 연결하는 주제에 대해서 모두 관심이 많았고, 다양한 페이퍼, 토론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다국적 기업은 이제 기업이 커지면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 되고 있고, 이런 기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자각이 있었다.


결론


마이너리티-소수자로 산다는 건 분명히 어려운 일이고, 나도 어느 순간에는 메이저리티-다수자인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소수자를 동정한다기 보다, 내가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고 그 소수자가 어쩌면 오리지널일 수 있는 세상에서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차별과 편견과 싸우는 노력은 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아니라 주변에 멋있는 사람들이 남성, 여성 가리지 않고 많았는데, 그들이 했던 것 처럼, 차별과 편견에 대해 싸우려는 시도가 없으면 그 차별과 편견은 절대로 바뀔 수 없다. 의식 중에 무의식 중에 차별과 편견을 가지는게 메이저리티의 자연스러움일 수 있으니까.


내가   어느 순간 나도 소수 마이너리티가 되는 순간이 온다.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촌스럽고 구닥다리이고 구린 차별과 편견의 프레임을 깨보자. . 나와 다른 존재들이 있고 즐거운 발견, 인터랙션과 흥미로움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리 잘났을까? 전세계 코로나 펜데믹을  치료제개발한 발명가라도 되는가? 빌보드 차트 1위를 툭하면 하는 bts 멤버인가? 어쩌면   억개의 별들    태양계 안의 지구라는 별에서 태어나 알량한 학벌과 부와 권력을 졌다고 생각하는 개미나 플랑크톤과 다르지 않은   종들  하나일 뿐인 인간 사람인 것 아닌가? 아니 니가 대체 뭔데 차별과 갈라치기를 선동하는 건데?


차별과 편견에 혐오라는 가면을 쓴 사람들을 만난다면 저 얘기를 날려주어야 겠다는 다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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