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마시거나 혹은 못 마시거나
나는 술을 못 한다. (이건 중학교 때 알았고..)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건 대학교 때 알았다) 남과 다른 것은 어떻게 해도 튀고 고달픈 것이다. 애주가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술을 못 마신다는 것도 그렇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고 넘치는데 술을 못(안)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하자.
‘연애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책,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책, 개인주의를 선언하는 책, 약간의 거리를 두며 살겠다는 책, 보노보노처럼 살겠다고 하는 책.. 이렇게 용기 있는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데 술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 용기도 마이너 하지만 재미있지 않을까? 나처럼 술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몰라!’
그런데.. 아무래도 술 안 먹는 사람의 술 안 먹는 이야기가 자칫 너-무 마이너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급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때 마침 희영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와 정반대인 술꾼 희영이가.
직업이 방송작가고 독립출판 책도 내서 난 늘 ‘작가’, ‘작가님’이라는 말을 듣고 산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내가 대단한 작가인양 착각할 때가 있다. 글 한 줄도 안 쓰는 날이 부지기수면서. 그러다 SNS에서 현실에 숨어있는 진짜 작가들을 발견하고 자괴하고 만다.
‘얘는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갬성이 장난 아니네’
나도 그렇고, 경상도 여자애들은 보통 서울에 정착하면 금방 사투리를 안 쓰게 되는데 희영이는 처음 인사부터 "나 경상도요!" 하듯 정체를 드러냈고, 알고 지낸지 3년째 변함이 없다.(역시 경상도 사람 특성상 자기는 사투리 안 쓴다고 한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가끔 불같고, 가끔은 대책 없이 해맑고, 가끔은 세상에 불만 많아 보이지만, 의외로 여린, 전형적인 외강내유인 희영이는 나와 참 비슷했다.
단 하나 다른 것은 도수. 술의 도수와 감성의 도수.
술을 잘 하고 못 하고의 차이일까. 희영이의 글은 왠지 술에 푹 적셔져 나온 것 같고 내 글은 취하다 만 글 같았다. 굳이 얄팍한 비유를 해보자면 희영이는 소주, 나는 맥주 같다. 그것도 한국 맥주. 근데 소맥 탈 땐 굳이 비싸고 맛있는 외국 맥주보단 만만한 한국 맥주가 좋지 않나. 난 희영이와 내 글이 한권의 책이 되면 제법 마실만한 소맥이 되리라 생각했다. 희영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책의 반틈(‘절반’의 사투리. 말했을 때 서로만 알아들음)을 맡아주기로 했고, 그렇게 브레이크가 ‘탁’ 풀렸다.
이 책은 읽는 당신의 도수에 따라 소주 맛이 더 나는 책일 수도, 맥주 맛이 더 나는 책일 수도 있다. 물론 절묘한 황금비율의 조합으로 ‘오, 어떻게 이런 맛이!’ 하는 맛있는 소맥이면 좋겠다는 욕심도 가져본다.
*<당신의 도수>에서는 술 못(안)마시는 사람을 ‘술찌(술 찌질이)’로, 반대를 ‘술꾼’으로 통칭합니다.
‘술쓰’, ‘알쓰’의 ‘쓰레기’보단 ‘찌질이’가 훨 낫잖아요! 귀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