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숫자놀음

질투의 색깔

by Anne H




인생이란 숫자놀음에 걸린 패가 아닐까. 학생 때는 점수로, 어른이 돼서는 돈으로. 그 놀음판에서, 나는 어떤 얼굴로 앉아 있어야 할까.


내가 쥔 패가 최고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할 거라 믿었던 시절. 내 뒤에 있던 어른들은 그게 맞아! 네 말이 맞아! 모두 이구동성으로 나를 응원했다. 그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지. 그 판이 어떤 판인지도 모르고.






30대가 되자, 친구들이 속속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인스타에 올라오는 사진의 물결이 변했다. 남친에서 남편으로, 연애에서 결혼생활로. 그러던 5년 전 어느 주말, 나는 중학교 친구의 어떤 사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입주한 아파트를 예쁘게 올린 사진. 그 앞에 조성된 공원과, 정돈된 거실의 풍경. '드디어 내 집 마련'이라는 짧은 문구.


짜증이 났다. 논리도 과정도 없는 감정. 한참 동안 남편과 집문제로 열을 올리던 때였다. 부동산이 오르는 속도를 계좌가 따라잡지 못했다. 흡사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같다고 해야 하나. 엉금엉금 열심히는 가는데, 6개월, 1년이 지날 때마다 깡충 해버리는 세상.


성공한 숫자의 기준이, 공부가 아닌 돈이 돼버린 나의 30대.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유난히 숨이 찼다. 공식대로 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일까.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을 나왔다. 괜찮은 직장도 들어갔다. 그런데, 왜? 왜 내가 갖고 싶은 것 하나를 갖는 게 이리도 어려운 걸까. 패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찼다. 내가 개패를 들고 있는 걸까.


집을 산 친구를 떠올렸다. 분명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좋은 대학을 간 것도 아닌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반칙을 한 게 아닐까. 이건 아니잖아. 성적에 비례해서 생기지 않는 부와 여유. 이건 내가 생각한 판이 아니야.


뭔가 있겠지. 합리화가 서둘러 길을 나섰다. 부모의 도움이나 투자 성공. 그런 것들을 찾아서. 답답한 마음에 드러누웠다. 아이보리색 천소파는 내 몸의 굴곡을 따라 푹 꺼져 내렸다. 미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부러움, 억울함 그리고 조급함과 두려움. 친구의 인스타를 여닫을 때마다, 마음의 날이 돌았다. 가차 없이 갈린 감정들은 몸속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질투라는 이름으로.






그날 이후, 친구는 예고도 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핸드폰을 열면 올라오는 새로운 사진들. 10년 동안 일면식이 없던 친구는, 날마다 성공의 다른 면들을 보여줬다. 명절엔 남편과 골프장, 생일에는 근사한 호텔 그리고 여유 있는 일상의 조각들.


"오빠, 내 친구 있거든. 중학교 친구. 근데 엄청 잘살더라"


집에서 헐렁한 옷을 걸친 채, 설겆이를 하고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아니 무슨 성공한 사람 같아. 공부도 엄청 못했었는데. 나랑 같이 학교 다녔거든?

결혼하고 나서 여유 있어진 것 같더라. 인생이 참 그래"


빈정대는 말투가 이런거구나. 친구의 '부'를 비꼬는 얄궂은 마음이 숨길틈도 없이 삐져나왔다.


"성공한 사람 같은 게 아니라, 성공한 것 같은데?"


남편은 심판처럼 이야기했다. 마치 내가 모르는 이 판의 규칙을 아는 듯이. 그리곤 공부는 못했지만, 성공한 사람들을 읊었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은 스티브 잡스. 중학교 중퇴지만 삼성을 만든 이병철, 본인의 적성을 살려 성공한 어떤 유튜버의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눈을 감고 싶었다. 더 이상 유효 패가 아닌 것 같은 나의 숫자. 취직한 순간부터 눈치챘던 이 놀음판의 성격. 세상이 아니라,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던건 아닐까.


나는 이 놀음판을 너무 모르고 달려왔다. 나와는 다른 판에서 게임을 했던 부모의 말을 무방비로 믿었다. 어떨 땐 내가 아는 규칙이 전부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귀를 막았다. 지난 날들이 모래처럼 흩어질까봐. 미래가 아닌 과거의 나를 위해서.


헐거운 창틀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들어왔다. 창밖 하늘은 맑은데, 집안에는 회오리가 돌았다.






나는 여전히, 이 놀음판에 짜증이 난다. 억울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엎어져있긴 싫어졌다. 제대로 규칙을 배워 이 질투와 싸우고 싶다. 끝까지 싸워서 제대로 한판 이겨보고 싶은 마음.


공부가 전부였던 10대를 후회하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냐고? 경제 공부를 하고 싶다. 투자를 하고 싶다. 더 많이 책을 읽고, 더 많이 밖에서 놀고 싶다. 어쩌면 아직 찾지 못한 나의 재능을 찾고 싶다.


하지만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이미 게임은 시작됐다. 나는 그저 숨을 들이마신다. 내가 쥐고 있는 패는 변하지 않을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시답지 않은 질투로 우울해질 바엔, 너를 연료 삼아 다시 시작해 볼 수밖에.


그러니 인생아, 판을 돌려라. 아직 내 패는 다 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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