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불편한 진실

질투의 색깔

by Anne H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나는 더 초라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승부욕이 강했던 나. 기대했던 등수가 안 나오면 집에 와 방문을 닫고 서럽게 울었다. 그리곤 다시 이기겠다는 일념하나로 공부를 했다. 성인이 돼서 달라졌냐고? 그렇지 않다. 어느 날 남편은 나와 더 이상 맞고는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이제 무서워서 못 치겠어"


고스톱을 치기 전부터 '져주면 안 돼, 봐주면 진짜 안 돼'라는 말을 반복. 그러나 막상 승부에 패배하면 단박에 모습이 바뀌곤 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얼굴이 빨개진 채 안방으로 쾅. 남편이 걱정돼서 "왜 그래, 그냥 게임일 뿐이잖아"라고 두들기면 무엇하겠는가. 넘어오는 소리는 흐느낌뿐인걸.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마음은 왜 여전히 이리 처량할까.


노력해도 되지 않은 걸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최선을 다해도 넘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게 거짓말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를 인정하기보다, 스스로를 채근했다. 더 열심히, 더 많이 해야 돼.


거짓의 알약을 하나 삼킬 때마다 허기가 졌다. 평생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짝꿍은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했다. 쉬는 시간이면 뚱뚱한 필통을 뒤적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럼 나는 이어폰을 끼고 문제집을 풀었다. 목표하던 점수로 가려면 아직 갈길이 산떠미. 내 필통엔 샤프 2자루와 지우개, 그리고 빨간펜이 전부였다.


암기력이 유난히 좋지 않았던 내겐 시간이 답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기말을 준비했다. 전날 외운 걸 까먹지 않기 위해 손을 혹사시켰다. 마치 소의 되새김질처럼 씹고 또 씹었다. 제대로 넘기지 못한 것들은 언제나 탈이 났기에.


중요한 모의고사가 있던 날. 퉁퉁한 손가락에 연필을 끼고 회전 돌리기를 했던 나의 동급생. 선생님은 어느 날 K를 호명했다.


"K가 전국 4등을 했다. 축하해 주자"


전국 4등? 전교 4등이 아니라? K는 무언가를 보면 그 장면이 오래 남는다고 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있던 능력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딱히 암기를 위해 노력하는 건 없다고.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듣긴 했다. 절대 음감을 타고났다는 조성진. 타고난 예술성으로 금메달을 휩쓰는 김연아 같은. TV를 보며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나와 먼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옆에 나타난 공부천재. 솔직히 배가 아팠다. 어떤 날은 가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디선가 열심히 공부하고 타고난 척 잘난 척을 하는 건 아닐까.






타고난 재능을 노력으로 이길 수 있다 생각한 날들이 있다. K의 똑똑함을 인정하기보다 내 노력을 탓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타고난 걸 인정하기엔 넘어야 할 파도가 높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더 몰아 붙었다. 잠을 줄이고, 더 오래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내가 들인 노력, 딱 그만큼 나는 좌절에 더 가까워졌다. 들인 노력에 비례해 좁혀지지 않는 거리는, 그녀의 타고남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은 어느 날, 나는 침대에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 일기를 썼다.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그건 어쩌면 스스로에게 보내는 패배의 고백과 같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포기하려 합니다. 그냥 받아들이려고요. 그래야만 내가 숨을 쉴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내려놓았던 그날 저녁, 나는 느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편안함을. 거짓된 나를 죽여야만 마주할 수 있었던 날것의 나. 거기에 진짜 내가 있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습관처럼 하는 것들이 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본다. 최선을 다할 때까지는 실컷 배 아파하고, 질투한다. 하지만 언젠가 스스로 '할 만큼 했다'라고 인정되는 시점이 도래하면, 숙연한 마음으로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저 깊이 묻어둔 진실의 알약을 삼킨다.


그 약은 여전히 참 쓰다. 약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목이 얼얼하다. 가끔은 눈물을 찔끔 흘린다. 해도 안 되는 게 여전히 참 많구나. 너는 참 잘난 사람이구나. 어쩌면 내가 넘을 수 없는 타고난 사람이구나.


내가 노력해도 가지지 못한 것들을 품고 사는 사람들. 그들 덕에 나는 어쩌면 시답지 않은 질투를 하며, 진실을 찾아 헤맨다.


오로지 나를 향한 불편한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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