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 변경, 일본에 남다...
내가 귀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그는 3개월 동안 십원도 보내주지 않았다.
일본에 있는 동안에
나는 꾸준히 장학금을 받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
석사학위도 받고 무사히 박사과정에도 진학했지만
내 통장에는 백만 원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돈을 보내지 않는 그에 대한 원망보다
나이 서른 중반에 돈 천만 원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이 이러하여 당장 취직을 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 당시 내 입장에서는 대학 시간강사자리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는 휴학을 하고 논문 진행도 당장은 스톱할 수밖에 없지만 생활이 좀 안정되면 논문을 마무리짓겠다고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들은 교수님께서는 살짝 짜증이 나신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우리 연구실, 특히 나의 지도교수님의 박사과정 제자들은 거의 연구자, 대학교수가 되는데
일본에서 대학교수가 되려면 전공분야와 모집학교에 따라 갖춰야 하는 능력이 크게 차이가 난다.
나의 전공분야에서 대학교수가 되려면 전공 관련 국가 자격증이 필수다.
박사학위를 요구하지 않는 대학도 있지만 전공 관련 국가 자격증은 99.9% 요구한다.
또 실습을 보내야 하는 분야라서 실습지도 자격도 필요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한국에 귀국하겠다고 했기에 그런 자격증 등을 따기를 권유하지 않으시고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논문지도에만 집중적으로 신경을 써주셨다.
1년 전 일본에서 취직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보신 것도
국가 자격증 시험이 1년에 한 번 밖에 없고
실습지도 자격을 위한 연수도 1년에 한 번이기 때문에 확인차 물어보신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와서 일본에 남을 것이고 바로 취직을 한다고 하니
교수님 입장에서는 너무 황당하셨던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그렇게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지 모르시고
논문도 일본대학에 취직하는 것도 포기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1년 정도
국가 자격증과 실습지도 자격을 취득하면 어떻겠냐고 조언하셨다.
당장 다음 달 먹을 것이 없어요
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친정에서는 도와주시겠다고 했지만
그 당시 나는 누구에게도 더 이상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싶지 않았다.
몸 건강하고 일할 의지가 있는데 노동을 해서 먹고살아야지, 박사가 뭐라고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며칠 후 갑자기 친정엄마가 일본으로 찾아오셨다.
엄마는 내게 그를 원망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다졌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6개월 후에 있을 전공 관련 국가 자격시험에 도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반쯤 미쳐서 처음엔 엄마에게도 누구에게도 돈 받지 않을거다며 무조건 스스로 돈을 벌거라고 난리를 피웠다.엄마는 딱 1년만 마지막으로 서포트해 줄게라며 나를 설득하셨다.
결국 나는 엄마와 언니가 준 돈을 받으면서
학회지에 논문 투고를 한 후 바로 국가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과목만 10개가 넘었다. 그중 세 개는 내가 학부 때는 배우지 않았던 과목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 이번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년에 대학에 자리가 나도 원서조차 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당시 아들은 초등 2학년이었는데 내가 없으면 밥도 잘 먹지 않고 잠도 잘 안 잘만큼
엄마 엄마 하면서 내 공부를 방해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온라인 강의를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나는 그 해 겨울 인플루엔자와 대상포진에 걸려서도 계속 공부만 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가채점을 하자마자 내가 합격했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나는 결과발표가 나기 전부터 박사논문을 진행시키면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대학 자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취직활동을 하면서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삼십 대 중반, 외국인, 박사학위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내가
얼마나 연구자로서 매력이 부족한지!
면접에 오라는 곳이 없었다.
엄마의 서포트기간도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국가시험공부와 논문, 취직활동에 최선을 다한 1년이 또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