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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Aug 19. 2024

별거 10년째(8)

일본에서 대학에 취직하기

매일 같이

원서를 넣을 수 있는 대학이 있나 구직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내가 살고 있던 도시에서 2시간 떨어진 작은 도시의 작은 사립 대학에서

1년 계약직으로 풀타임 강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출산과 육아휴직을 하는 교수님을 대신해서

정말 딱 1년만 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계약 갱신은 불가하며,

당장 2달 후에 시작하는 가을학기부터 와줄 것,

반드시 대학이 있는 도시로 이사를 와 줄 것,

교수회의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당장 지도교수님께 이곳은 어떤지 여쭤보았다.

나는 왠지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 같았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박사논문 진척도 더디고

취업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을 아시고 너무 안타까워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모집내용을 읽으시고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조건이지만

1년 계약직이라도 귀한 경험이 될 것 같다며

긍정적인 코멘트를 해 주셨다.


나는 당장 원서를 냈고 면접을 보았다.

대학강의 경력이 없다는 것을 걱정하는 면접관들 앞에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그리고

한 달 후 아이들과 함께 그 대학 사택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별거를 시작한 지 1년 정도...

그러니까 엄마의 1년간의 서포트도 끝나는 시점이었다.

시영아파트에서도 나와야 해서 또다시 갈 곳 없는 타이밍이었다.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남편과 별거 직후 내 통장에는 백만 원 남짓밖에 없었고

나는 논문이며 박사며 다 필요 없고

무조건 돈을 벌어 아이들을 내가 키울 것이다며 울부짖고 있었는데...

1년의 계약직이긴 하지만 꿈에 그리던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다 하나님 덕분이다.

모두 교수님과 친정 가족들, 친구들, 같이 고생한 아이들 덕분이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1년 계약직이라도

1년 먹을 양식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어깨춤이 절로 쳐졌다.

새로운 도시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며

월급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 줄 생각을 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다 보니

그를 떠올릴 때가 점점 적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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