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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Aug 22. 2024

별거 10년 째(13)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수기 (Numbers) 14:7~9a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내게 있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것이 바로 B사립대학이었다.

교통과 교육, 문화시설, 생활환경이 훌륭한 도시에 있는 B대학~

여기에 내 전공과 일치하는 과목을 담당할 정규직 교수모집 공고가 났다.

내가 A대학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지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일본은 3년도 안되서 근무지를 옮기는 것을 좋게 평가하지 않으며 B사립대학은 분명 쟁쟁한 후보들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괜히 원서를 넣는 수고를 하지 말라고 조언하셨다. 언제나 내가 잘되기를 원하시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순간 멈칫했다...


그렇다.

당시 나는 박사학위가 없는 상태이며...

국가자격증 취득을 위한 학사 과정을 담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며...

교육과 연구경력이 적고...

능력도 어느것 하나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평범 그 자체이다.

일본대학에 취직하려고 할 때 학회에서의 활동도 중요하게 보는데 

나는 한국에 귀국할 거라고 생각해서

학회에도 부지런히 참석했지만 눈에 띄는 활동을 하거나 봉사하거나 한 경력도 없다.

B대학에는 아는 교수가 딱 한 명뿐이 없었다!ㅠㅠ

 

그런데도 나는 그 자리가 내 자리인것만 같았다.

원서를 내는 조건에 반드시 박사학위 취득자라고 쓰여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일본에서는 박사학위 유무대신 연구실적을 위주로(B사립대학은 학회지 게재 논문 5편이 조건)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B대학은 국제사회에 경쟁력있는 대학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해당학부 50명 교수 중 외국인이 없었다. 학과에 전공이 겹치는 교수님이 있는지, 나이와 성별 등도 샅샅이 살펴보았다.  

결정적으로 내 자리라고 확신한 것은, 담당할 과목이 미묘하게 한 가지 전공만으로는 가르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나는 사실 학부와 대학원의 전공이 약간 달라서, 일본에서 대학에 취직하기에는 핸디캡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가지를 전공한 내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나는 지도교수님과 상의하여 원서를 냈고, 한달 후쯤 면접에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일본대학의 인사(人事)과정은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가 등의 내부정보를 절대 유출해서는 안되며, 소개라던지 인맥으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다. 물론 지방에 따라, 전공에 따라, 학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미 내정되어 있는 인사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지만... 


나는 B대학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요, 그들은 나의 밥이다! 라고 생각하며 도전했다.


면접은 모의강의를 하고 난 후, 여러 명의 면접관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것이었다.

사전에 철저히 B대학의 학생의 레벨과 분위기를 찾아보고 상상하며 수업안을 만들고 자료를 준비했다. 하지만 사실 매일 A대학 수업준비와 수업, 학생지도, 집에 가면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애들을 돌보고... 모의강의와 면접준비를 충분히 하지는 못했다.


지도교수님은 내게

교단에 섰을 때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고 분명하게 전하고 교단을 내려왔을 때는 머리와 허리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라

고 하셨다.

 

나는 파워포인트를 켜고 앉은채로 준비한 수업내용(대본)을 당당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3명의 면접관도 아닌 뒷 쪽에 참관하고 있던 교수님 한 분이 내가 말하는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이다.


이렇게 수업할거예요? 책 읽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읽어 내려갈 거예요?
학생들이 듣겠어요?!!! 이 과목에 gruop work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순간, 아 망했다. 컨셉을 잘못 잡았구나. 이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구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치심이나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다, 교수님의 얼굴, 아이들의 얼굴... 미안함과 속상함이었다.

0.1초만에 나는 눈물을 꾹 참고 여유있게 말했다.

이런 스타일의 수업, 이 학교와 어울릴 것 같아서 준비했는데 제가 실수한 것 같네요. 그러면 이제부터 정말 제 수업스타일을 보여드릴게요.


나는 대본을 버리고 일어났다. 앞에 있는 면접관과 참관하러 온 교수님을 학생(아니라, 밥)이라고 생각하고 평소에 수업을 하는 것처럼 수업을 이어갔다.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의 나의 최대치는 보여주고 싶었다.


면접은 더 어려웠다. 응모동기, 전공관련 이슈에 대한 나의 견해, 현재 대학에서의 교육내용, 해온 연구와 앞으로 할 연구내용, 과연 일하면서 박사학위 취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도 있었다...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2시간 동안 나는 소리높여 기도하며 울부짖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주소서  

B대학 환영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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