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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Aug 22. 2024

별거 10년째(14)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애굽기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2019년 4월, 별거한 지 4년이 채 되지 않아 나와 아이들이 꼭 살고 싶어 하던 도시로 돌아왔다.

그것도 유명 사립대학 정규직 교수(직위는 전임강사)가 되어서 말이다.


나는 매일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바로 가까운 곳, 내 직장인 B대학과도 가까운 곳으로 보금자리를 구했다.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오가며 피곤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라서 일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학원도 주위에 널렸고, 영화관과 쇼핑몰도 자전거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커다랗고 햇볕이 잘 드는 연구실도 배정되었다.

이쁜 정장도 여러 벌 샀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미고 출근했다.


A사립대학에 비하면 담당수업과목도 적고 연구환경도 좋았다. 게다가 월급은 훨씬 많았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같았다.

그런데 나는 잠을 도통 이룰 수가 없었다.

아토피는 조금 좋아졌는데 이번엔 매일같이 두드러기가 수시로 온몸을 휩싸는 것이었다.

아이들 데리고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불안증상과 불면증은 늘 있었는데...

B대학에 오고 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조차 편히 앉거나 누울 수 없을 만큼 불안감이 심해졌다.


어라, 정말 감사하고 기쁜데... 이 긴장과 불안함은 뭐지...?

별거하고 4년간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으니 이제는 좀 즐겨도 될 텐데

나는 어색함과 긴장감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트레스로 인한 공황장애증상과 비슷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말하는 적응장애(適応障害)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짐작 가는 이유는 있다.


먼저, 꿈에 그리던 도시로 돌아왔고, B대학에 취직도 했지만

나는 타 도시에서 또 이사를 했고, 아이들은 전학을 했다.

이사와 전학에 따른 각종 서류작성과 할 일은 산더미였다.

A대학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이사하고 애들 전학시키는 모든 일을 혼자서 했기에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리고... 내가 B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은 이 지역 교민들과 연구실 관계자들에게 금방 퍼져나갔다.

시기와 질투로 나를 멀리하는 사람, 나의 능력을 시험하고 평가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놓고 <일본학생들이 너 같은 유학생보다 교수되기 불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내 취직소식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줄이고 행동을 조심 또 조심했다.

또한 한편으로 나를 아주 스마트하고 유능한 커리어우먼으로 멋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도 아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데 사람들은 내 겉가죽만 보고 나를 부러워했다. 그즈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B대학 교수로 부르고, B대학교수로 대접해주었다. 몇 년전만해도 가난하고 모자르고 정신나간 유학생이었는데...뭔가 너무 답답했다.


또 내가 과연 B대학 교수에 걸맞은 능력을 가지고 있나? 는 의심을 타인들 뿐 아니라 스스로 가장 심각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어서 이곳에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초조하게 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별거하고 4년이 넘는 동안 남편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

B대학에 취직했고, 안정적인 환경을 갖추었으니 이제 남편과 마주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다.


마지막으로... 이제 드디어 박사논문을 제출할 시기가 온 것이다;;;;;

내 나이 마흔이 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입성해서도 끊임없이 여러 민족들과 전쟁을 해야 했던 것처럼...

나는 또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냠냠~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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