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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Aug 23. 2024

별거 10년째(16)

박사님의 은밀한 사생활

아이들과 함께 일본에 온 지 10년 만에

남편과 별거한 지 5년 만에

코로나시기였던 2020년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난 후 1년 동안

나는 오랜 시간 기다리게 했던 아이들에게 온 정성을 쏟았다.

매일 아이들이 좋아할 요리를 했다. (나는 요리하는 것이 싫다 싫다 싫다 싫다 ㅋ)

매일 아이들을 상냥하게 배웅하고 반갑게 맞았다.

매일밤 아이들과 뉴스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웃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약 1년간 모든 수업을 비대면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대부분의 수업을 zoom으로 진행하였다.

청소기를 돌리다가 시간이 되면 컴퓨터를 켜고 수업을 했다.

립스틱만 바르고 조명을 밝게 하면 공들여서 메이컵을 한 것처럼 보였다.

하의는 집에서 입는 헐렁하고 편안한 바지를 입고 상의만 깔끔한 블라우스를 입어도 충분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누워서 쉴 수도 있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안락함과 여유를 느꼈다.

물론 아이들이 사춘기인데다가 코로나 시기에 학교에 갔다가 못 갔다가 하니 짜증도 늘고

둘이 서로 싸우고;;; 아이들 돌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나는 수업준비 이외의 어떤 공부도 연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나자 그동안 나를 끔찍하도록 고통스럽게 했던 아토피가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매일 밤 올라오던 두드러기도 잠잠해졌다. 내친김에 꽃가루 알레르기 면역 치료도 꾸준히 했다.

밤에는 해변을 뛰기도 하고 혼자서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코로나 시기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일본에서 늘 긴장하며 살 와왔던 내게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이들과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적을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직장에서도 교회에서조차도 상황을 파악하여 맞추고, 특히 말을 조심해 왔다.

하루에도 몇 백 명씩 마주해야 하고, 보이고 평가받는 직업인 교수가 된 다음엔 더더욱 튀지 않으려고 애썼다. 연구회나 학회도 직접 갈 필요가 없고 온라인상에서도 카메라를 끄면 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애써 웃을 필요도 없고 분위기 파악해서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내 인생에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아... 이렇게 계속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무능력하다며 아이들을 키우지 못할 거란 소리를 이 세상 누구에게도 듣지 않아도 된다.

정년까지 건강하게 일하면서 아이들을 대학 보내고 내 노후를 준비하고 싶다는 희망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충분히 실현 가능해졌다.


남들 보기엔 엄마 혼자 키운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자녀들을 돌보았다. 지난 10년간 정말 힘들었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와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지만 아이들과는 자주 통화하며 소통하려고 애썼다.

나는 남편에게 이사나 전학, 아이들의 교육비 등에 대해 카톡으로 여러 번 연락을 했지만

대부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편은 내가 대학에서 정규직 교수(전임강사)가 된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시간강사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업이 좀 안정이 되었는지 몰라도 첫 째가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생활비를 꽤 보내왔다. 감사했다.


그렇게 나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서서히 되찾아갔다.

인생 처음으로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말 그와 마주해야 한다.

벌써 별거를 시작한 지 6년이 흘렀다...

맛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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