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입사하고 처음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복사’였다.
아마 이건 어느 직무나 상관없이 신입사원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
복. 사.
복사를 시작하면서 프린터기는 나만의 친구였으며 그 녀석을 잘 다뤄야지 내 하루가 편했다.
혹시라도 종이가 낀 날에는 이런 고역이 따로 없었다.
살살 달래서 빼면 말끔하게 뽑히지만 재수 없으면 잘못 찢겨서 종이가루가 사이사이 박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리업무에는 회사의 모든 기기들을 잘 다뤄야 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회사에서 프린터기를 임대해 한 달에 한번 업체 직원이 나와 기계를 봐주셨다.
신기하게 같이 있으면 말짱했던 기계가 직원분이 가시면 고장이 났다.
고장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대부분 종이가 끼는 사고가 99%이다.
어느 순간 이 프린터기의 엄마역할도 내가 맡게 되었다.
뭔가 걸려서 프린터물이 안 나오면 나도 모르게 몸이 일어나서 움직이고 있다.
다른 직원이 해도 내가 가서 도와주다 보니 이제는 프린터기 박사가 되어있었다.
복사업무에 이어 스캔이 기다리고 있다.
한 번은 입사 초기에 같이 일했던 대리님의 부탁으로 A4용지 50장도 넘는 많은 양의 스캔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대리님의 실수로 회사 견적서가 스캔이 같이 되었다.
나는 시킨 대로 스캔을 해서 메일로 전달했을 뿐인데 그 사건으로
대리님은 나와 일주일 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왜 이것까지 스캔했냐면서 나에게 화를 쏟아냈다.
‘대리님, 근데 거래처에 이메일 보내기 전에 첨부파일 확인은 기본 아닙니까...?’
이건 내 잘못인가? 그의 잘못인가?
건네받은 내용까지 꼼꼼히 확인을 했어야 했던 걸까.
내 파트의 업무가 아니었기에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전달만 받은 일인데..
그때 사회 초년생이라 대리님의 반응으로 일주일 동안 맘고생을 했더랬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대리님과는 다시 말을 하게 되었지만,
그날의 사건은 나에게도 회사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걸 깨닫게 해 주었다.
누군가 건네준 일이 잘못됐을 때, 본능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책임 전가를 하게 된다.
절대 잊으면 안 된다.
회사는 전쟁 터라는 걸.
그 일을 계기로 스캔 부탁을 받으면 내용도 한번 훑어보게 되었다.
비록 내가 맡은 파트는 아니지만 어쨌든 회사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회사의 기밀이 거래처에 노출되는 거만큼 핵폭탄은 없다.
한번 지뢰밭을 경험한 나로서는 그 사건이 나에게 큰 자각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회사에서 안 중요한 직무는 없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나만의 무기로, 나만의 킥으로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
서로가 맞물려서 일하게 된다면 더더욱 레이다망을 뾰족하게 세워야 한다.
오늘도 회사에서 스캔하는 직장인 분들,
눈 크게 뜨고 하시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