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一秒) 차이로

by 아마도난

부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 미세먼지로 전국이 뿌옇다가 모처럼 맑고 화사한 하늘로 바뀌어서 그런지 살짝 들뜬 기분이 들며 잔잔하게 틀어놓은 발라드 음악이 쏙쏙 귀에 들어왔다. 특별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다분히 날씨 탓이었으리라.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덧 부여를 벗어나 공주에 들어섰다. 바로 그때 KTX 공주역이 쓰인 도로 표지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도로 표지판이 나타날 때마다 어김없이 눈길이 따라갔다. 그간 이 길을 오가며 숱하게 봤을 그 글자가 오늘따라 생뚱맞게 눈길을 확 사로잡은 것이다. 공주역이 생긴 이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그래서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그곳이 궁금해서 운전대를 돌렸다.


멀리서 보이는 공주역은 거대했다. KTX가 정차하는 곳이니 그만한 길이의 플랫폼도 필요하고, 그만한 크기의 역사(驛舍)도 있어야겠지…. 거대한 역사 앞에는 그에 걸맞은 넓은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었지만 몇 대의 차량만이 세워져 있어 휑한 느낌이 들었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역 앞 택시 승차대에는 서너 대의 택시가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버스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아 거대한 역사가 외려 을씨년스럽게만 보였다. 에이, 이런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돌아왔어? 차라리 보지 말 것을….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2~3Km쯤 갔을까? 전방에 나타난 도로 표지판에 직진 방향으로 공주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런! 길을 잘못 들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차선을 바꾸려는 순간 마치 유령처럼 트럭 한 대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슬로비디오처럼 차 앞으로 범퍼가 튕겨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차를 멈추고 내려서 살펴보니 과속방지턱을 조심스럽게 지나간 것 같은 정도의 충격밖에 없었는데도 차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사고 한 번 내지 않았고, 그 10년 동안 딱 1장의 범칙금만 냈을 뿐인 내 애마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견적을 받아보니 치료비가 3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몸이 멀쩡 해서였을까? 당황스러운 마음 대신에, 안도하는 마음 대신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냥 다니던 대로 서울로 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왜 공주역을 보려고 낯선 길로 접어들었다가 이런 일을 당했는지 황당하기만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1초만 빨리 차선 변경을 했더라면 범퍼 대신 내가 차 앞으로 튕겨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KTX공주역 구경 값을 톡톡히 치른 것이다.




1년 전. 엄홍길 휴먼재단의 네팔 지부장이 13번째 휴먼스쿨 준공식을 하루 앞두고 예기치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3번째 휴먼스쿨은 2015년 4월에 발생한 네팔 지진의 진앙이 있던 고르카에 지어졌다. 지부장은 지진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 희망을 안겨줄 학교를 완공하고, 준공식 준비를 모두 마친 뒤 숙소로 돌아가다 변을 당한 것이다.


그의 숙소는 약간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학교와 숙소 사이에는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길이 있다고 한다. 그는 멀지만 완만한 경사의 오른쪽 길로만 다녔는데 무슨 얄궂은 운명이었는지 그날은 짧지만 경사가 급한 왼쪽 길을 따라 귀가했단다. 불행의 시작은 사고 나기 이틀 전에 내린 많은 비였다. 그로 인해 지반이 약해져 있었는데 오른쪽 길에 있던 큰 바위가 왼쪽 길로 굴러 떨어져 마침 그곳을 지나던 지부장을 덮친 것이다. 그가 늘 다니던 대로 오른쪽 길을 택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설사 왼쪽 길을 택했더라도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그곳을 지났더라면 죽음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황당하게 그는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사람은 불행을 면했고 다른 한 사람은 목숨을 잃었다. 찰나의 순간에 극단적으로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눈 한번 깜짝할 시간, 그 시간이 1초쯤 될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사람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니 그 1초를 어찌 가볍다고, 감히 짧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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