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도 지나고 남녘에서는 매화며 동백꽃 소식도 들려오는데 아직도 바람이 차다. 집을 나선 발길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사실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있으니 갈 곳은 이미 정해진 셈인데 공연히 주춤거려 본 것이리라. 백제대교를 향해 길머리를 잡았다. 다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금강 둑길이 나온다. 오늘의 산책 코스다. 둑길 밑으로는 널찍한 둔치가 펼쳐져 있다. 둔치 중간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연인 한 쌍이 보였다. 그들은 봄이면 유채꽃이,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길을 다정하게 걷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손을 잡고 걷고 있을까? 손가락만 잡고 걷고 있을까?’하는 상상을 하다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손을 잡든, 손가락을 잡든 아니면 손을 안 잡고 걷든 무슨 상관이람? 싱겁기는…!
강변 풍경이 평화롭다. 사람들은 이곳이 백제의 마지막 서울이라고 하는데 그때도 강변이 지금처럼 한적했을까? 강 위로 유람선 한 척이 지나갔다. 관광객으로 들끓어 강 위를 여러 척의 유람선이 노닐면 흥이라도 날 텐데 한 척만 덩그러니 지나니 외려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한적한 이 강의 풍경이 좋다. 둔치가 끝나는 곳에서 둑길로 올라섰다. 둑길 너머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자주 보는 작품들이지만 미술에 불민한 탓에 그 형이상학적인 조각들의 의미를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그저 돌덩어리 보듯, 쇳덩어리 보듯 데면데면 지나갔다. 공원을 지나니 피로가 느껴졌다. 다리를 쉬게 해 줄 때가 된 것이다.
커피숍은 가파른 계단을 지나 2층에 있다. 심호흡을 하고 커피숍 문을 열었다. 바리스타의 경쾌한 목소리가 먼저 반긴다. 주말과 휴일에는 빈자리를 찾기 어렵지만 주중에는 한적했다. 게다가 창밖으로 부소산과 구드래 조각공원도 보여서 바깥 풍경을 보며 커피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었다. 입으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눈으로는 계산대 너머를 살피다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찾는 사람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바리스타에게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사장님을 찾느냐고 묻는다. 알바라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라고 대답하자 누군지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까닭 없이 서운했다. 만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 그녀가 없다는 게 왠지 섭섭했다. 어쩌면 다시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아쉬움도 한몫했는지 모른다. 부소산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문 너머로 부소산을 바라보며 백제시대 유적과는 크게 관계없을지도 모르는데 마치 백제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산을 흘겨봤다. 오늘따라 커피는 왜 이리도 맛이 없는지….
잠시 후 ‘오셨어요?’하며 다가오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그 여자다. 어쩌면 이리도 헛짚을 수 있는지. 사장을 알바로 생각하다니. 곱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반가웠다. 반가우면서도 어색해서 ‘혹시 책 좋아해요?’하고 물었다. ‘그럼요.’하는 대답에 반색하며 자그마한 봉투에 담아 온 '사비로 가는 길’을 주었다. 그녀는 ‘잘 읽겠습니다.’하며 소중하게 받아 들고 계산대로 돌아가더니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초콜릿인데요. 밸런타인데이여서 직접 만든 겁니다. 드셔 보세요.’하며 내민다. 앙증맞은 상자 안에는 4가지 종류의 작은 초콜릿이 담겨 있었다. 밸런타인데이! 내게서 저 멀리 꽁무니를 보이며 사라진 줄 알았던 밸런타인데이가 성큼 되돌아온 느낌이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이라…. 괜히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다.
휴식을 끝내고 커피숍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아까… 주신 책. 혹시 직접 쓰셨나요?’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에 오실 때까지 꼭 읽겠습니다.’하고 책을 가슴에 품었다. 집을 나설 때 차갑게 느껴졌던 날씨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포근함으로 바뀌었다. 올봄은 그녀의 미소에서부터 시작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