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바심

by 아마도난

집 밖을 나서면 코끝을 간질이는 꽃 향기에 발길을 옮기기가 어려운 계절이다. 아니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발길이 꽃 향기를 따라가곤 한다. 한파가 기승을 부린 게 엊그제였는데 벚꽃을 필두로 진달래, 개나리 목련이 앞 다투어 자태를 뽐내더니 어느덧 라일락마저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하루라도 늦으면 사람들의 눈길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한꺼번에 활짝 핀 것이다. 아무리 꽃이라지만 이렇게 질서를 어지럽혀도 되는 걸까? 올해에는 꽃들이 경쟁적으로 고개를 동시에 내밀었다. 지구가 너무 더워져서 꽃들도 철 모르고 제멋대로 꽃망울을 터뜨린 모양이다.


친구들이 모였다. 아들을 결혼시킨 친구가 답례를 핑계로 가까운 고향 친구들을 초대한 것이다. 고향이 주는 포근함 때문일까? 오랜만에 만난 이성 친구도 순식간에 구면인 것처럼 스스럼 없이 농담을 하고 장난을 쳤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지? 그릇들이 묵직해서 다행이었다. 남자 넷이 모이면 어떻게 될까? 어항이 깨진다고 한다. 그 또한 다행이었다. 수족관이 없는 일식 집이어서. 그런 여자 셋에 남자 넷, 도합 일곱 명이 모여 회포를 풀었다. 일곱 명이 왁자지껄하게 대화를 나누니 쥔장의 눈길이 수시로 우리 쪽을 향했다. 다른 손님들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곱 남녀의 수다는 거침이 없어 식탁 위의 그릇들이 요동을 치고, 썰어 논 참치 회가 춤을 추려고 한다.

그 나이가 된 것인가? 대화의 주제가 아이들 얘기로 넘어갔다. 벌써 할머니가 됐다는 둥, 딸이 올 봄에 시집갔는데 친정 근처에 집을 얻은 게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둥 여자 동창들이 대화의 주제를 끌고 갔다. 그때 한 친구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했다.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 친구는 “몰라, 네가 알아서 해. 끊어!”하고 외치듯 말하고 통화를 끝내다가 우리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미안해 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죄로 내가 물었다. “야, 야 무슨 전환데 그렇게 험하게 받냐?” 그 친구는 민망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막둥인데 올해 대학에 들어 갔어. 그런데 내일 여자 친구랑 꽃구경을 간다나? 그런데 도시락을 지가 준비하기로 했다며 유부초밥 만드는 법을 알려 달래잖아.” 여자 친구랑 놀러 가면서 사내 자식이 도시락을 싼다는 말에 속이 상한 것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요즘은 다 남자가 준비해.” 하며 그런 일로 속상해 하지 말라고 다른 여자 친구가 말했다. 이웃 중에 상처하고 혼자 살고 있는 70대 남자가 있는데 어느 날 남자, 여자 각각 2명씩 네 명이 꽃 구경을 가기로 했단다. 그들은 심지 뽑기를 해서 각자 무엇을 준비할 지 정하기로 했는데 이 남자가 도시락을 싸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도시락을 싸기 위해 며느리에게 자문을 구했다. 당연히 며느리가 도시락을 싸 주겠다고 나섰지만 남자는 그것을 뿌리치고 직접 시장을 보고 밤잠을 설치며 도시락을 싸더라는 것이다. 며느리는 안절부절 못했지만 남자는 아랑곳 없이 흥에 겨워 가벼운 발걸음으로 봄 나들이를 가더란다.

속상해 하는 친구에게 내가 말했다. “유부초밥 싸는 거 일일이 가르쳐 주지 말고 인터넷으로 찾아 보라고 해. 어지간한 음식 만드는 법은 인터넷에 다 나와 있더라고.” 다른 친구들도 맞장구를 쳤다. 이제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하게 놔두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애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친숙하니까 모르는 것은 다 찾아서 해결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거들었다. 그 말이 위로가 됐는지 친구는 모른 체 하겠다며 환하게 웃는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그 친구의 엉덩이가 바람이 가득 채워 진 풍선마냥 들썩거려서 우리는 자리를 일찍 파해야 했다.


세상이 바뀐 모양이다. 아니 바뀌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도시락을 싸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만큼 그렇게 바뀌었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우리가 대학을 졸업하고 퇴직할 때까지 보통 30년을 일하잖아. 그런데 인생 백세시대에는 퇴직을 하고 나서도 30년은 더 활동할 수 있을 시간이 생겨. 그러니 퇴직 후 무엇을 새로 시작해도 전혀 늦지 않다고 봐야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여자를 위해 남자가 도시락을 싸고 꽃이 피는 시기를 무시하고 꽃망울을 터뜨려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니 세상은 이미 저만치 가 있는데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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