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말았네

by 아마도난

서울의 9개 지하철 노선 중에서 가장 한가하다는 6호선. 이 열차도 출퇴근 시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북적인다. 집에서 회사까지 그리 멀지 않아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출근하면서 타고 내리는 역이 모두 환승역이어서 혼잡스럽기는 여느 노선 못지않은 것이다.


퇴근시간. “봉화산, 봉화산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는 안내방송과 함께 역에 도착한 열차. 출입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열차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숨통이 트였다 하며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잠시. 내린 사람들 못지않은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타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숨을 내쉬는 사람,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 그리고 괴로운 듯 자세를 바꾸는 사람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그 틈바구니에 나도 끼어 몸부림을 친 끝에 겨우 숨 쉴 공간을 만들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며 사람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짧은 찰나를 이용해 조금 더 여유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래 봐야 오십 보 백 보지만…. 꼼짝할 수 없는 몸은 놔두고 고개만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하나같이 마스크 쓴 얼굴들이다. 코로나 19가 가져온 새로운 풍속도다.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치 인류의 종말을 경고하는 공상과학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여 자세를 바로잡은 뒤 앞을 바라보다 젊은 여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눈빛으로 짐작컨대 꽤 아름다운 여인일 것 같았다. 낯선 사람들끼리 눈을 마주치면 곧바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마련인데 이 여자는 피하기는커녕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서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다시 앞을 보니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 묘한 분위기는? 나에게 반했나?’ 이번에는 나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생각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내가 나이 든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나? 혹시 내 눈빛에 반한 거야?’ 묘한 흥분마저 들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쓰는 모양이다. 한 정거장을 가는 시간이 억겁이라도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열차가 다음 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기는커녕 아예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애타는 마음에 반응하려는 입을 힘겹게 억누르며 속으로 말했다. ‘아무리 내가 매력적이어도 이처럼 혼잡한 곳에서 그런 눈으로 날 보면 당혹스럽잖아. 기다려. 곧 역에 도착하니 내려서 이야기하자구!’ 마침내 열차가 역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때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저씨, 발....”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하게 바라보자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아저씨, 발 좀 치워주세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아래를 보니 그녀의 백팩에서 바닥으로 늘어진 끈을 밟고 있는 내 발이 보였다. 내가 끈을 밟고 있어서 내내 불편했던 모양이다. “미안해요!” 하며 부리나케 발을 옮기자 그녀는 열차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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