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없으니까....

무기력한 출근길에서

by 아마도난

출근길.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지듯 열차에서 내렸다. 그 무리 속에 휩쓸려 한 층을 더 오르면 개찰구가 나온다. 이곳을 통과할 때마다 "환승입니다. 화, 화, 화 환승, 환승, 환승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원래는 "환승입니다." 하는 맑고 고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 소리가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려는 사람, 경전철에서 전철로 바꿔 타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환승입니다." 하는 소리가 미처 마무리되기도 전에 연이어 통과하는 사람들로 인해 숨 가쁘게 더듬는 소리로 바뀌는 것이다. 가끔은 "화 화 환승입니다." 하는 소리가 "화 화 환장하겄네." 하는 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다. 하긴 사람이 하루 종일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면 견뎌낼 수 있을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한 층을 오르면 눈 앞에 빈 점포들이 을씨년스럽게 나타난다.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임차해서 장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멀쩡한 점포들이다. 그 점포들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 시민들을 위해 비워놓은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그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휑하니 비어 있다. 그곳에 커다란 통나무를 숭덩숭덩 잘라 만든 간이 의자가 있다. 직경이 50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둥근 의자는 어떤 엉덩이라도 내려놓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넉넉했다. 그런 간이 의자 네 개가 제멋대로 놓여 있다.


매일 똑같은 풍경을 보며 무감각하게 출근하던 어느 날 젊은 남자가 그곳에 나타났다. 그는 익숙하게 간이 의자를 구석에 모아놓고 그중 하나에 백팩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점포 벽에 등을 대더니 또 다른 의자에 두 다리를 올려 무릎을 굽히고 얼굴을 묻었다. 별할 것도 없는 사내가 만든 물화 같은 풍경이 내게 작은 변화를 불러왔다. 졸린 듯한 표정으로 그 앞을 지나던 내게 가벼운 호기심을 불러온 것이다. '렇게 추운 날씨에 잠들었다가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다음날 아침 출근시간. 그 남자는 이미 모든 채비를 마치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장을 하고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변화가 없는 일상이 새롭게 시작됐다.


새롭게 변한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통나무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젊은이가 보이지 않으니 아침 출근길에 꼭 있어야 할 뭔가를 잃은 것 같은 허전함이 들었다. 무미건조했던 일상에 작은 파문도 일었다.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일까?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뭐람?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무료했나? 다시 며칠이 지났다. 습관처럼 통나무 의자 쪽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젊은 남자가 시 나타난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자는 대신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실이었다.


무료했던 출근길에 자그마한 활기가 생겼다. 젊은 사내가 통나무 의자에 앉아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이다. 핸드폰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졸고 있을까 하는 상상도 뒤를 이었다. 우습기도 하지. 그 사내가 있든 없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아무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은 은밀한 호기심을 품고 나니 출근길이 마냥 무료하지 않아서 좋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비상인데 그 젊은이는 마스크도 하지 않았던데.... 그에게 마스크라도 선물하면 나의 아침길에 더 큰 활기가 생겨나려나 아니면 바뀐 일상이 또 반복되려나? 그보다도 코로나 19 가 바꿔 놓은 세상이니 코로나 19에게 책임을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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