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de out

노병은 사라질 뿐이다.

by 아마도난

"여기 하고 여기에 성함 쓰시고 도장 찍으시면 됩니다." 정중하게 말을 건네며 손가락으로 해당되는 곳을 짚어주자 그는 살짝 부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마침내 모든 게 끝났다. 이제부터 그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겠지. 깡마른 몸에 세월이 남겨준 훈장을 얼굴 가득히 담고 그는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 집무실로 쓰던 곳이니 가구나 집기 하나하나에 손때 묻지 않은 곳이 없을 테고, 그의 숨길이 닿지 않은 공간이 없으리라. 만감이 교차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나도 숙연해졌다.


"내 나이가 올해로 여든둘인데...."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인사자료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본인의 입을 통해 숫자를 듣게 되니 새삼 놀라웠다. 창업주나 회사의 오너가 아닌 람이 80살이 넘도록 정규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회사가 또 있을까? 근무한 사람도 존경스럽고 그 나이가 되도록 직원을 품어주는 회사도 대단하다. "회장님 하고는 두 살 차이고....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내왔는데...." 나이 든 사람들이 종 보이는 모습이 그에게서도 나타났다. 옛날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와는 공식적인 관계만 있었을 뿐 사적인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퇴직하는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긴 대화를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주로 얘기했고 나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벼운 추임새를 넣으며 듣기만 했다.


"기사 퇴직금 말인데.... 줘야 해." 갑자기 화제가 바뀌었다. 퇴직연금이 적립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말이야 27살 때부터 기사를 두고 살았어. 그래서 기사들에 대해 잘 알지." 27살? 그러면 금수저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수저라도 된단 말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화려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면서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을, 아마도 죽는 날까지 기억해두고 싶을 이야기들을 연이어 꺼냈다.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회만 되면 꺼내서 반추했을 삶에 대한 자부심 이리라.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은 몇 번째 사람일까?


그가 다시 화제를 돌려 본인의 퇴직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적립된 퇴직연금액을 알려주자 그는 눈빛에 섭섭함인지 의혹인지 가름할 수 없는 의미를 담아 보냈다. '혹시 퇴직위로금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싶어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 그는 몇 마디 듣지 않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내가 이 회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말이야...." 이쯤에서 그의 이야기는 조금씩 두서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을 테고 젊었을 때와는 달리 총기도 많이 사그라진 탓일 게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위를 돌아보다 벽에 걸린 그림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이 그림이 원래는 내 건데...."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 점밖에 없는 그림인데 값어치가 좀 나갈 거야. 잘 보관해 둬." 말을 마치고 그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사무실을 떠나면서 그는 직원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내게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자 주름진 그의 손에서 따스함이 전달되어 왔다. 짧은 시간 동안 압축된 베테랑의 값진 일생을 들으면서도 행여 무리한 요구라도 할까 봐 긴장했던 나의 옹졸함 그의 따스한 손길에 사그라들었다. 옅은 미소를 띠며, 다 어내지 못한 미련을 가슴에 담 그는 사라질 듯 사무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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