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와 굵고 짧게

총량 불변의 법칙(?)

by 아마도난

대학을 마치고 처음 들어간 회사는 종합상사였다. '수출입국'이라는 기치 아래 정부로부터 지정받은 7개 종합상사는 대학 졸업생들이 선호하는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수출부서로 발령받았다. 고객이 해외에 있으니 시차 때문에 늦은 밤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다. 그 시절에는 출부서가 아니어도 많은 선배들이나 동년배들이 야근은 물론 주말이나 휴일에도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요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시대였던 것이다. 그때 떠돌았던 우스개 소리가 '돈 쓸 시간이 없어서 돈 번다.'였다.


종합상사를 떠나 백화점과 호텔업을 하는 회사로 옮겼다. 사업개발팀장으로 근무하며 국내외에 펼쳐 은 몇 건의 굵직한 사업을 주관했다. 비중 있는 사업들이어서 영진에게 보고하거나 회의에 참석할 일이 많았다. 사업장이 지방이나 해외에 있어 출장도 잦았다. 그야말로 숨 쉬는 게 다행일 정도로 바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팀원 한 명이 긴장한 표정으로 면담을 요청했다. 무겁게 시작한 면담은 5분도 걸리지 않아 웃으며 싱겁게 끝났다. 요구 '업무 좀 나눠주세요.'였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 기획팀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회사가 도약을 꿈꾸며 M&A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룹의 장기비전을 마련하고, 일정에 맞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인수합병이 채택된 것이다. 많은 회사들을 분석하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회의를 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일도 없이 일에만 빠져 있고 걸핏하면 출장으로 집을 비우게 되자 아내는 차라리 회사를 옮기라며 역정을 냈다. 옮겨갈 회사도 알아본 듯했다. 아내의 간절한(?) 소망도 뿌리치고 일에 매달려 있던 어느 날 팀원들이 볼맨 소리를 했다. 자기들에게도 일을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고 그룹의 핵심인재라는 소리를 듣던 때여서 팀원들의 불만도, 아내의 성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했고, 그에 걸맞은 성과도 올렸다. 반대급부로 최연소 임원이 었다. 쯤 되니 하늘이 손톱보다 작아 보였다. 일을 하는 동안 엔도르핀이 솟아 힘든 줄을 몰랐고 잠시라도 할 일이 없으면 그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식이 뭔지 몰랐고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어낼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청춘도 러갔다.

잘 나갈 때 조심하라고 했던가?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가볍게 생각했다. 이미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는데 달콤함에 취해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정점을 향해 달려갈 때 나는 정점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그들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회사를 떠났다.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직장생활은 한 줌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난날의 성과는 저축되지 않고 그때 바로 소비되고 사라졌다는 사실도 그제야 깨달았다. 마침내 짧고 굵은 회사생활이 막을 내린 것이다.


회사생활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대신 오랫동안 꿈으로 간직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지런히 글을 쓰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쓰기를 지도해주시던 교수님의 격려도 큰 몫을 했다. 몇 년이 지나자 교수님은 소설에도 도전해볼 것을 권유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교수님의 격려에 힘입어 2권의 장편소설을 냈다. 원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가 세 권의 책을 내는 것이었으니 목표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세 번째 소설의 초고가 끝날 무렵 가까운 지인이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아니 강요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설임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규모도 작고 근무환경도 열악했다. 모든 것이 생경했는데 무엇보다도 업무에 임하는 직원들의 자세가 많이 변해 있었다. 워라밸이 대세를 이루고 주 52시간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상급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퇴근했고, 아무리 급해도 야근이나 주말출근은 하지 않으려 했다. 회사를 떠나 있던 몇 년 사이에 나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샐러리맨의 꽃'이라 불리던 임원 '향기 없는 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직급에 관계없이 정년까지 보장받는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실리적인 면에서도 임원이 안 되면 정년까지 근무하며 월급을 받을 수 있지만 임원으로 승진하면 일찍 회사에서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임금 총액으로 따져도 임원이 되는 게 오히려 손해라는 주장도 한몫한 것 같았다.


가늘고 긴 직장생활이 좋은지 굵고 짧은 직장생활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난 굵고 짧았던 직장생활에 후회는 없다. 덕택에 세 권(?)의 책을 남기게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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