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른 아침. 낯선 사내 수십 명이 굳은 얼굴로 회사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혹시 건설 계열사에 민원을 제기하려고 집단행동에 나선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당시 사옥에는 계열사들이 본사나 서울사무소를 두고 있었는데 건설회사의 본사도 입주해 있었다. 그 무렵 건설사는 주택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행여나 서툰 일처리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로비에도 낯선 사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주택과 관련한 민원을 제기하러 온 사람들은 아니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 오니 내 책상 옆에도 굳은 표정의 사내가 있었다. 누구냐고, 무슨 일이냐고, 어디에서 온 사람이냐고 물어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국세청에서 나온 조사관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세무사찰을 나온 것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직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누구보다 긴장한 사람은 나였다. 오래 동안의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조사관들이 분주하게 직원들의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박스에 담고, PC에 저장된 자료들을 복사했다. 내 옆에 버티고 있던 사내도 불응하면 금고를 통째로 가져갈 수 있다는 으름장과 함께 책상 서랍과 금고를 열어달라는 요구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금고를 열었더니 순식간에 조사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컴퓨터용 디스켓과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금고를 사이에 두고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나는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내가 그랬다. 베테랑 조사관들의 송곳 같은 질문에 맞서 밤을 낮 삼아 대응논리를 찾아가며 대차게 논박했다. 사안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해서 필사적으로 방어해야 하기도 했고, 내가 검토하고 실행한 것들이어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으며 조사를 받던 어느 날 조사관 한 명이 "이번 조사 끝나면 이사님 몸값이 2배쯤 뛸 겁니다." 라며 덕담인지 위로의 말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그의 말에 "몸값 2배는 기대도 하지 않으니 조사 끝나고 잘리게 되면 일자리나 주선하시오."하고 대꾸했다. 100 여일 가까운 세무조사가 끝났을 때 몸값이 2배로 뛰기는커녕 몸만 2배로 축이 났다.
세무조사의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같은 조사국에서 계열사에 조사를 나왔다. 표면적인 조사 내용은 단순했지만 기업주와 관련된 것으로 자칫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어쩔 수없이 관여했다. 이번에도 조사는 100 일 가까이 지속됐다.조사기간도 길었지만 기업주와 얽힌 사안이 대부분이어서 정신적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 조사가 끝났을 때 이번에는 몸 대신 마음이 2배로 축났다.
계열사로 전보됐다. 몸과 마음이 모두 홀가분했다. 순조롭게 업무에 적응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국세청에서 정기 세무조사를 나왔다. 허 참! 내가 일복을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국세청과 나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것인지.... 수시조사보다는 수월하다고 하지만 국세청 조사가 만만한 적이 있던가? 선방했다는 평은 받았지만 마음은 더욱더 지쳐있었다.
그룹에서 글로벌 기업과 합작법인을 설립하면서 다시 한번 이동을 제안받았다. 외국인들과 근무한다는 것이 부담은 되었지만 묘한 흥분도 들어 제안을 받아들였다. 회사가 출범하면서 모기업이나 합작 파트너와 논의할 일도 많았고 해외출장도 자주 나가는 등 한동안 무척 바빴다. 대신 노력한 만큼 성과도 나타났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게 탈을 불러온 모양이다. 아니면 노는 꼴을 그냥 지켜보기 싫었던 누군가가 심술을 부렸던지.... 국세청에서 이전 가격 조사를 나왔다. 회사 이익을 해외로 부당하게 이전시켰는지 알아보려는 조사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국세청은 합작파트너에게서 제품을 비정상적으로 비싸게 샀는지 아니면 과도하게 많은 기술료를 지불했는지를 따졌다. 조사는 무난하게 끝났지만 회사생활에 진절머리가 났다.
회사를 떠나 몇 년 동안 바람처럼, 구름처럼 여행도 다니고 글쓰기 공부도 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고, 소설도 두 편이나 썼다. 그러는 사이에 어쩌다 다시 신입사원이 되어 회사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심술궂은 운명의 신은 내가 회사에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모양이다. 갑자기 국세청 조사관들이 회사에 들이닥쳐 조사 통지서를 눈앞에 들이대며 협조를 요청했다. 기가 막혔지만 팔자소관이려니 하며 입꼬리는 살짝 올리고 눈꼬리는 내려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들을 대했다. 그들이 사무실을 떠날 때도 세상에서 가장 고분고분한 사람이라고 믿게 하려는 것처럼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웃음 뒤에 "이번이 너희들과의 인연도 마지막이야!"라는 절규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