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미·체로

by 아마도난

오랜 백수 생활을 끝내고 회사에 다시 출근하려고 할 때 “지금까지는 국·영·수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음·미·체로 살아야 해!”하며 강력하게 만류하던 친구가 있었다. 국·영·수의 삶이란 비록 원치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처자식들과 먹고살려고 열심히 매달리며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정작 재미있는 과목은 음악, 미술, 체육이었는데도 좋은 대학에 가려고 좋아하지도 않는 국어, 영어, 수학을 열심히 공부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하고 싶은 것, 재미있는 것을 하며 사는 음·미·체의 삶이 인생 2막을 더욱 풍부하고 값지게 할 거라며 재취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주장이 워낙 완강하고 그럴듯해서 결심을 잠시 보류했었다. 하지만 국·영·수 삶을 매조지기 위해, 오랫동안 직장 생활하면서 벼리고 벼려놓은(?) 지식을 마지막으로 전수해주려고 출근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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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늘 주머니에 넣고 애지중지했던 지식은 손때만 잔뜩 묻었을 뿐 회사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귀한 옥(玉)이라고 생각했던 주머니 속 지식이 알고 보니 유리구슬에 불과했고, 그런 착각이 나의 오만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그와 함께 시원섭섭했던 마음이 시원함으로 갈무리되고, 국·영·수 삶도 그림자의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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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뉴월 모닥불도 쬐다 말면 섭섭하다고 했던가? 막상 국·영·수 삶을 끝내려니 허전했다. 위로가 필요했다. 이때 『삼생삼세 십리도화(三生三世十里桃花)』라는 중국 드라마가 눈길을 끌었다. 천상계와 인간계를 넘나들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사랑하는 신들의 이야기였다. 58부작이라는 장편 드라마를 지루하지 않게, 아니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다. 여운도 길게 남았다. 중국 고서 산해경(山海經)과 중국 고대 전설 및 신화를 바탕으로 쓴 웹소설이 원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만화 『신과 함께』와도 맥이 닿으면서 규모는 훨씬 방대한 드라마였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신이 있다. 바리데기, 자청비, 오늘이, 강림도령, 궁상이, 해당금이, 당금애기, 할락궁이… 등등. 문제는 우리 신들의 이야기가 구비문학(口碑文學), 즉 무속인들의 입을 통해 대부분 전승되어 옴으로써 짜임새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신(主神) 제우스를 중심으로 계보나 위계가 명확한 그리스·로마 신화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들에게도 관계를 맺어주고, 우리 정서에 맞는 에피소드를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로마 신화의 트로이 전쟁보다 더 장쾌한 ‘탁록대전(涿鹿大戰, 동이족인 치우와 화하족인 헌원이 패권을 놓고 다툰 전쟁)’을 신화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삼으면 가슴 뛰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도전 목표가 생겼다. 우리의 신들 사이에 계보와 위계를 만들어주고, 삼생삼세 십리도화처럼 그들을 에피소드로 이어 멋진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신화로만 알았던 트로이 전쟁이 역사로 밝혀졌듯이 신화로만 전해오는 탁록대전이 훗날 역사로 밝혀지는 계기를 만들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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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일찍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라는 말을 했다. 국·영·수 삶을 끝내고 음·미·체로 돌아가면서 좋은 목표가 생겼다. 우리 신화 사랑이다. 이제부터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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