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TV 드라마 「서동요」가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데다 주연을 맡은 남녀 탤런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여서 부여에 마련된 드라마 세트장은 촬영이 있을 때마다 톱스타들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자주 가던 성흥산성(백제 시대에는 가림산성으로 불리었다)의 사랑 나무는 지금도 많은 연인이 찾는 명소로 남아있다. 백제의 왕자와 적대국인 신라의 공주가 만들어낸,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촬영한 곳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미녀일지도 모르겠다. 오죽했으면 서동이 소문만 듣고 그녀와 혼인하려고 서라벌로 갔을까? 대궐 앞에 자리 잡은 서동은 어린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 방에 밤에 몰래 안겨 간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는 노래(薯童謠)를 부르게 한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부른 노래라서 그럴싸하다고 생각했을까? 몹시 화가 난 진평왕은 서동의 의도대로 공주를 궁에서 쫓아냈고, 쫓겨난 선화공주는 서동을 따라 금마(오늘날의 익산)로 오게 된다. 서동은 백제 30대 임금인 무왕이 되었고, 왕비가 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익산에 미륵사를 짓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암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에서 미륵 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하였다. 이를 보고 부인은 그곳에 큰 절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 법사에게 연못을 메울 방도를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 삼상(彌勒三象)과 회전(會殿), 탑(塔), 낭무(廊惫)를 각각 3곳에 세우고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 『삼국유사』
2009년에 훼손이 심한 익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한 뒤 다시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서탑 안에 들어있던 사리병, 금제 사리 봉영기, 구슬 등 9,900여 점의 사리장엄구(사리 및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용기 그리고 탑에 넣은 부장품의 통칭)가 발견됐다. 바로 이 순간 질투의 신 ‘젤로스’가 익산 미륵사지에 강림했을까? 미륵사가 선화공주에 의해 창건됐다는 1,400여 연간의 믿음을 뒤집는 내용이 사리봉영기에서 발견된 것이다.
…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승보(勝報)를 받았다.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이 되었다. 이에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서기 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사람이 선화공주가 아니고 사택 왕비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선화공주가 졸지에 역사적 인물에서 가공인물이 된 것이다.
익산에는 천도(遷都) 설 혹은 별도(別都, 또 하나의 수도) 설과 연관된 왕궁리 유적이 있다. 익산시 웅포면 오류동(梧柳洞)도 무왕과 관련 있는 곳이다. 원래는 어류동(御留洞, 임금이 머물던 곳) 즉, 무왕이 머물렀던 곳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어느 전문가는 선화공주가 신라 사람이 아니고 익산지역 유력자의 딸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사비에 기반이 없던 서동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고,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요구한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허무하다. 국경을 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그렇다면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서동요」도 그야말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단 말인가? 선화공주와 관련하여 익산에는 미륵사 창건 설화뿐만 아니라 또 다른 설화도 있다. ‘서동을 따라 금마에 온 선화공주가 살림에 보태라고 금덩이를 꺼내자 서동은 마를 캘 때 많이 보던 것이라며 커다란 금덩이 다섯 개를 가져다주었다. 공주는 기뻐하며 이것을 용화산 사자암에 있는 지명 법사를 통해 신라로 보냈다.’ 익산지역 오금산(五金山)에 전승되어 오는 전설이다. 미륵사지 창건 설화뿐만 아니라 오금산 설화에도 선화공주 이름이 나오는데 이 모든 게 허구란 말인가?
무왕은 60세가 넘도록 살았고 왕위에 있던 기간도 41년(서기 600년~641년)에 이른다. 평균수명이 30대를 넘지 않았다는 삼국시대에 엄청나게 장수한 것이다. 혹시 무왕에게 사택 왕비 말고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는 유적으로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불리는 쌍릉(雙陵)이 있다. 무왕의 무덤인 대왕릉은 수릉(壽陵, 살아생전에 미리 조성한 무덤), 소왕릉은 죽은 뒤 조성한 무덤이다. 전문가들은 소왕릉이 서기 621년에서 630년 사이에 조성된 왕비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무왕은 641년에 서거하였으니 죽은 왕비의 곁에 묻히기 위해 대왕릉을 미리 준비한 셈이다. 애처가 무왕이 사랑한 소왕릉의 주인은 누구일까?
사택 왕비는 무왕이 서거한 이듬해(서기 642년)에 서거했으니 소왕릉 조성 시기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왕릉의 주인은 선화공주라고 봐도 될까? 한때 출토된 부장품에 신라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2019년에 실시한 발굴에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소왕릉의 주인은 여전히 미지수로 남겨진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살려내기 위해 억지라도 부려봐야겠다. 오금산 설화에서 금덩어리를 신라로 보냈고, 미륵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하는 지명 법사, 그는 누구일까? 신라 진평왕 때 중국 유학을 다녀온 지명(智明) 법사라는 고승이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대 백제에도 지명(知命) 법사가 있었다고 한다. 묘하다. 비록 한자는 다르나 같은 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고승이 서로 다른 나라에 존재하다니…. 혹시 신라의 지명 법사가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에 와서 한자 이름만 바꾸어 활동한 것은 아닐까? 이게 사실이라면 선화공주가 신라 사람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을 텐데….
백제의 전형적인 사찰 형식은 1 탑 1 금당인데 미륵사만이 특이하게 3 탑 3 금당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중원(중앙 목탑, 금당, 문)이 가장 먼저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서원(서탑, 금당, 문), 동원(동탑, 금당, 문) 순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3명의 왕비가 각각 발원해서 완성된 사찰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사리봉영기의 발견으로 두 번째로 완공된 서원은 사택 왕비가 발원한 것이 확인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첫 번째로 완공된 중원의 발원자다. 누구일까? 서라벌에서 ‘서동 방에 밤에 몰래 안겨 간’ 선화공주는 당연히 서동을 따라 금마까지 오지 않았을까? 일연스님도 아무 근거 없이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지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테고….
서동요! 앙숙 관계인 백제 왕자와 신라 공주가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이야기라니…. 그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익산 그리고 미륵사지와 언제까지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정황도 선화공주의 실존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