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칼코마니 두 임금

by 아마도난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가장 먼저 추천한 책이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깨어있는 지성인이 되라는 당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 책에서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의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끊임없이’ 대화를 해도 많은 나라에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무슨 까닭일까? 이에 관해 철학자 헤겔이 남긴 ‘역사와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민족과 정부가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거나 원칙을 끌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했던 적이 없다는 점이다.’라는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진왜란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국토 대부분을 유린당한 조선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오랑캐라며 우습게 여기던 청나라에게 또다시 병자호란의 수모를 겪었다. 조선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했고, 원칙을 끌어내지 못했다. 당연히 문제해결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잘못된 역사를 반복했어도 조선은 나라를 잃지는 않았지만, 아예 망해버린 나라도 있다.


한산대첩과 삼전도비




백제 21대 개로왕(혹은 근개루왕, 재위 455~475년)은 즉위와 동시에 왕권 강화에 나섰다. 17대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굴욕을 당한 이후 계속되어온 고구려의 압박을 벗어나 복수도 하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개로왕은 중국 송나라에 신하 11명의 관작을 요청하여 장군직을 제수받았다. 『송서 백제전』 11명 가운데 왕족이 8명이고 귀족은 3명뿐이었다. 백제에는 유력한 여덟 가문, 즉 대성 8족이 있었는데 당시 백제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은 진씨와 해씨였다. 개로왕이 송나라에 관작을 요청한 인물 중에 이들 가문의 사람은 없었다. 개로왕의 왕권 강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개로왕은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공격에 대비하여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우는 등 방비도 강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려고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미 백제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런데다 고구려 장수왕도 백제 정벌을 치밀하게 준비하여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바둑 고수인 도림대사를 첩자로 보내 내부 분열을 노렸다. 도림대사는 개로왕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게 함으로써 국고를 탕진시키고 민심도 떠나게 했다. 사전 준비를 마친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했고, 패전을 예감한 개로왕은 플랜 B를 가동했다. 태자 문주에게 도성을 떠나도록 지시한 것이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을 필요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은 백제를 배신하고 고구려군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 걸루와 만년에게 붙잡혀 아차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들은 왕을 죽이기 전에 얼굴에 침을 세 번 뱉었는데, 왕권 강화로 받은 불이익이 그만큼 커서 그랬다는 견해가 있다. 도성이 함락될 때 왕을 구하려고 달려온 백제 귀족보다 신라 지원군이 먼저 왔다는 사실도 개로왕이 처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도미 부인 설화 역시 왕권 강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있다.


삼국사기는 도미를 편호소민(編戶小民, 미천한 평민)이라고 했지만, 도미 부인이 ‘몸종을 예쁘게 단장시켜 대신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즉, 귀족인 도미가 왕권 강화에 나선 개로왕에게 불만을 품고 반발하다 안구(眼球)를 뽑히는 형벌을 당한 뒤 추방되었고, 개로왕은 혼자 남게 된 도미 부인을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그녀는 몰래 도성을 빠져나와 천성도에서 추방된 남편을 발견하고 함께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원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을 참수한 후 고구려군은 대후(大后, 왕비), 왕자 등도 모두 살해했다. 백제 왕실의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개로왕의 지시로 도성을 벗어나 있던 태자 문주는 웅진으로 천도하여 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로왕에게 억압받았던 해씨와 진씨는 웅진에서 세력을 회복하여 병관좌평 해구가 문주왕을 시해하고 삼근왕을 옹립하기에 이른다. 새로 등극한 삼근왕은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에게 해구를 죽이게 했다. 그 이듬해 삼근왕이 돌연사했는데 일부 전문가는 진남 등이 시해한 것으로 추측한다. 개로왕이 추진했던 왕권 강화정책이 허무하게도 물거품이 된 것이다.


서울 풍납토성과 부여 나성




200여 년이 지나 백제에서 비슷한 일이 또다시 일어났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가 ‘역사는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한 번은 비극의 형태로, 다음에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다른 형태의 비극들로 계속 반복되기도 한다.’라고 한 말을 입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반복됐다. 그리고 백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무령왕과 성왕의 노력으로 국가가 안정되자 의자왕은 개로왕이 그랬던 것처럼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귀족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의 상황이 일본서기 655년 기록에 있다. (642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견해도 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 교기(翹岐)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그리고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다.
『일본서기』


사비 시대를 대표하는 귀족은 사택(砂宅)씨였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국왕의 어머니는 사택 왕태후로 익산의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교기와 누이동생은 의자왕의 이복동생들로 사택 왕태후 소생이다. 의자왕이 시도한 왕권 강화정책은 성공했고 신라에 대한 백제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이 무렵부터 ‘해동증자’라 불리던 의자왕에 대한 평이 여색을 탐하는 방탕한 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16년(서기 656) 봄 3월,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이 적극적으로 말리자, 임금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간언하는 자가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당나라 소정방도 사비성을 함락하고 난 후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성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라는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碑銘)을 남겼다. 의자왕이 황음에 빠져 총기를 잃었다는 기록들이다.


그뿐이던가? 사비성에서는 괴이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시대 700여 년 동안 205건의 재이(災異)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105건이 의자왕 말년에 나타났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민심을 이반시키기 위해 백제에 보낸 첩자 조미압과 금화가 퍼뜨린 유언비어였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으니 의자왕에 대한 폄훼와 비방도 계속해서 이루어졌을 테고…. 게다가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그랬듯 의자왕도 귀족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재이설은 군주가 실정을 하면 하늘은 재해를 내려서 경고하고, 재해로도 반성하지 않을 때는 인간이 짐승을 낳는 등의 괴이한 현상을 발생시켜서 놀라게 하였으며 그래도 반성하지 않으면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이론으로 중국 한나라의 동중서가 정리했다


더욱 불행한 사실은 개로왕과 달리 의자왕은 플랜 B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로왕의 아들은 웅진에서 나라의 명맥을 이었지만, 의자왕의 아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역사는 때로는 다른 형태의 비극들로 계속 반복되기도 한다.’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대로 백제는 그렇게 역사에서 퇴장당한 것이다. 허무하게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이라는 노랫말만 강물에 남겨놓고….

(월간 수필문학 202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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