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픈 이야기, 삼천궁녀

by 아마도난

부여를 대표하는 부소산. 가장 높은 곳이라야 100m 남짓에 불과하나 계곡과 능선을 교차하며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있어 규모에 비해 깊고 그윽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는 부소산을 둘러보고 갈수록 ‘아득하다’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맛있는 음식도 세 번이면 질리는데 부소산성 산책로는 매일 가도 새롭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평상시에는 백제 왕궁의 후원이었고, 유사시에는 방어 진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부소산은 규모는 작아도 매력이 넘치는 산이다.


부소산의 서쪽 끝,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낙화암(落花巖)이 있다. 사계절 모두 풍광이 뛰어나 부여를 상징하는 곳이다. 낙화암에 대해 『삼국유사』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자.


『백제고기(百濟古記)』에서는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아래로 강물에 닿아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죽임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남의 손에 죽지 말고 차라리 자살하자며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속설(俗說)이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인(宮人)이 떨어져 죽었더라도,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낙화암이라는 말 대신 타사암이라고 표현했다. 그뿐인가? 삼천 명의 궁녀가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표현은 고사하고 의자왕과 후궁이 떨어져 죽었다는 속설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어 북망산에 묻혔다. 『삼국사기』에는 낙화암 혹은 타사암에 대한 기록조차 아예 없다. 낙화암이라는 단어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로소 나타난다. 그것도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가 아니고 꽃이 떨어진 바위, 꽃바위라는 무척 감성적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삼천궁녀. 이 말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당나라 때 시인 낙천 백거이의 「궁사」 가운데 “꽃 같은 삼천궁녀 얼굴, 봄바람 속에 눈물 흔적 없는 이가 몇 명일까(三千宮女如花面 幾箇春風無淚痕)”라는 표현이 있다. 삼천궁녀라는 말을 사용한 유일한 시이다. 백거이는 당나라에 궁녀가 삼천 명이나 있어서 그렇게 읊은 것이 아니고 ‘많다’라는 의미의 비유적 표현으로 ‘삼천’을 쓴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 東方朔)도 그가 오래 살았다는 뜻이지 180,000년을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백도 높은 폭포를 바라보며 “날아 솟았다 바로 떨어진 물줄기 삼천 척 (飛流直下 三千尺)”이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삼천’은 ‘많다’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일 뿐이다.


풍광이 뛰어난 낙화암에 올라서면 누구라도 시흥이 오를 수밖에 없다. 조선 성종 때 공조참의를 지낸 김흔은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었다. 중종 때 민제인도 백마강부(白馬江賦)에서 “누각에 숨어 하늘을 보니 삼천이 구름과 같다…. (隱樓觀於層空 望三千其如雲…)”라고 노래했다. 김흔도 민제인도 백제 멸망을 떠올리며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내려보다 ‘삼천’이라는 문학적 표현이 들어간 멋진 시를 남긴 것이다. 혹시 그들은 그 순간에 백거이의 시를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배경이 무엇이든 ‘많다’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삼천’에 홀연히 궁녀가 붙어 ‘삼천궁녀’가 되더니 어느덧 의자왕에게 삼천궁녀와 놀아난 호색한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었다.


실체가 생기자 지조와 절개를 위해 분연히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29년 낙화암 위에 백화정이 지어졌다.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의 詩 ‘강은 비단 같고 꽃은 백화네 (江錦水樹百花州)’에서 따온 이름이다. 금강 주변에 이만한 절경이 없다. 1966년에는 삼천궁녀를 추모하는 궁녀사를 짓고 매년 제사도 지내고 있다. 막연한 비유가 구체적 실체가 되어 부여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 것이다. 이쯤 되자 부여를 찾는 사람들은 황포 돛배에 올라 ‘꿈꾸는 백마강’이나 ‘백마강’이라는 유행가를 들으며 낙화암 밑을 한 바퀴 돈다. 그들은 낙화암을 올려다보며 삼천궁녀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겠지?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엉뚱한 곳에서 삼천궁녀를 그리워할까 두려워 그랬을까? 낙화암의 위치가 잘못 알려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백마강 변이 아니고 왕포천 변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무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있고, 그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하여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자들도 여러 번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대왕포(大王浦)는 왕포천이 금강과 만나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왕포천을 따라 나지막한 구릉이 펼쳐있고, 그 중간에 수직 절벽이 있다. 일부 사람들이 진짜 낙화암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절벽 위에는 쌀 한 말(斗)이 들어갈 정도로 바위를 파낸 다음, 그 자리에 다시 쌀 1되(升)가 들어갈 수 있도록 파낸 흔적이 있다. 두승(斗升) 바위라고 불리는 곳이다. 백제 시대에 이곳부터 사비성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커다란 깃발을 꽂았다고 한다. 두승 바위는 기를 꽂기 위해 다듬은 바위, 꽂바위다. 우연히 꽃바위와 발음이 같다 보니 이곳을 낙화암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낙화암은 무엇이고 삼천궁녀는 또 무엇이기에 이런 사달이 벌어진 건지….


오늘도 부여를 찾는 사람들은 백마강 황포 돛배에 올라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하며 노래를 부른다. 역사적 사실도 아니고 전설로 전해진 이야기도 아닌 삼천궁녀. 허상에 불과한 그녀들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도 웃프고 낙화암의 위치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모습도 참으로 웃프다.

(월간 수필문학 2021.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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