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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Jun 06. 2019

우여

금강하구둑에서 상류 방향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오성산이 있다. 높이는 200여 미터에 불과하나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어서 정상에 올라서면 금강을 포함한 주변이 한눈에 보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 산에 오르려는데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안개를 뚫고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에는 오성인지묘(五聖人之墓)라고 새긴 커다란 비석과 다섯 개의 묘가 나란히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러 가다가 오성산에서 짙은 안개에 갇혀 길을 잃었다. 그때 5명의 노인이 나타나자 소정방이 사비로 가는 길을 물었다. 노인들이 “너희가 우리 백제를 공격하러 왔는데 어찌 적에게 길을 가르쳐 준단 말이냐!” 하며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소정방이 다섯 노인을 죽였다고 한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돌아가던 소정방이 다시 이곳에 들러 노인들의 충절을 기려 시신을 수습하고 후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그때 이후 이 산의 이름이 오성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 전해 오는 전설로 매년 군산시가 이들을 추모하는 제를 지내고 있다. 혹시 이 노인들은 백제의 장군들이 아니었을까? 당나라가 금강 하구에 상륙하여 사비를 향해 진군하다 처음 맞닥뜨린 백제의 저항을 오성인이라는 전설로 희석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오성산에서 금강을 따라 10여 Km쯤 상류에 웅포가 있다. 곰개라고도 하는데 곰이 물을 마시려고 엎드린 형상이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 즉 곰나루와 더불어 단군조선의 ‘곰 토템’이 부여, 고구려를 거쳐 백제까지 전승되어 온 흔적은 아닐는지…. 이곳에는 백제 무왕이 쌓은 어래산성(御來山城)이 있었다. 오성산에 이어 이 산성에서도 백제군은 진격해 오는 당나라군에 맞서 격전을 벌이지 않았을까?




금강을 따라 군산에서 곰개, 갓개, 강경 그리고 부여에 이르는 동안 ‘우여 회’ 혹은 ‘우어 매운탕’이라는 간판을 단 음식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여 혹은 우어라고 불리는 이 물고기의 원래 이름은 웅어다. 웅어는 매년 봄에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갈대밭에서 살았다고 하여 위어(葦魚)라고도 불렀다. 맛이 고소해서 조선 시대에는 위어소를 두고 봄철이면 항상 임금님께 진상했던 귀한 물고기다. 조선 시대 문인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웅어가 얼마나 맛있는 생선인지 가늠케 하는 노래를 읊기도 했다.

겸재 정선의 ‘杏湖觀漁’, 행주에서 웅어를 잡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가는 꼬리는 은장도를 뽑은 듯하고

긴 허리는 옥척처럼 번득인다

칼로 저며 흰 서리 같은 회로 만들어도 좋고

석쇠에 놓고 구워도 좋다


   (옥담사집).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은 평소 웅어를 보양식품으로 먹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말을 듣고 어부들에게 이 물고기를 잡아 오라고 명하였는데 그 많던 백마강 웅어가 모조리 강바닥으로 자취를 감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의자왕을 위시하여 귀족과 백성 1만 3,0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압송되어 갈 때 백마강 하류에 있는 유왕산(留王山)에 백제의 백성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모여들었다.  그들은 잡혀가는 의자왕에게 눈물로 안녕을 고하며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통곡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웅어들도 의자왕이 탄 배의 뱃전에 스스로 몸을 부딪혀 죽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웅어에게 ‘의리를 아는 물고기’라는 의미로 ‘의어(義魚)’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 의어가 세월이 지나면서 우여가 되었다고 한다.


의자왕은 660년 음력 8월 17일에 당으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매년 이날에는 백제 사람들이 유왕산 마루턱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의자왕과 끌려간 가족들을 추모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왕산 놀이가 유래되었다. 추모행사가 끝나면 "이별 별자네 서러 마소 만날 봉자 또다시 있네. 명년 8월 17일에 악수 논정(握手論情) 다시 하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헤어졌다.





태자 시절 의자왕은 효로서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다고 하여 ‘해동증자’라 불리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는 정복군주로 위용을 떨쳤다. 그래서 의자왕에 대해서는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높았다.”라는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그런 의자왕이 마지막 5년 동안에는 삼천 궁녀를 거느리고, 주지육림에 빠져 황음을 일삼으며 은고의 치마폭에서 놀아나다가 나라를 잃은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과연 정사를 어지럽히다 나라를 잃은 왕에게 그토록 많은 백성이 충의를 보였을까? 더군다나 물고기조차 왕에게 충성을 보였다고? 사비수를 지키는 용이나 황산벌에서 장엄하게 옥쇄한 오천 결사가 방탕한 왕을 지키려고 목숨을 던졌을까?


백성들이나 계백의 오천 결사, 그리고 우여는 ‘해동증자’ 의자왕을 지키려고 목숨을 던졌을 게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한 나라를 무너뜨릴 만큼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김유신 장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니 약간의 각색도 더해졌을 것이고……





매년 봄이면 “우여 매운탕 한 그릇 같이 하게 고향 한번 다녀 가~”하는 친구의 전화를 받곤 했다. 군 복무할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이 친구는 묵묵히 동네 어귀를 지키는 수백 년 된 정자나무처럼 한결 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의리와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친구 목소리라면 자다가도 뛰쳐나오고, 친구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 팔 걷고 나서던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가 “우여는 부여 것이 진짜배기여~”하며 봄에 꼭 다녀 가라고 성화를 대곤 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고향을 찾아가면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우여 매운탕, 우여 회 등을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밤을 낮 삼아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다. 몇 년 전 이 친구는 불귀의 객이 되어 우리의 곁을 떠나 버렸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우여 매운탕’ 타령을 들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때문인지 마치 봄철에 꼭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어져 버린 것처럼 허전하다.





웅어를 주제로 하는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위에 정의롭고 자애롭다는 이름을 가진 백제의 마지막 임금, 그 임금에게 죽음으로 충의를 지킨 우여 그리고 우여 매운탕을 좋아하던 친구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친구는 술을 어지간히도 좋아했는데…… 봄이 가기 전에, 우여가 바다로 돌아가기 전에 고향에 가서 우여 매운탕을 끓여 놓고 친구에게 술 한잔 권하고 돌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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