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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Apr 12. 2019

금강은 알고 있을까?

오성산에 올랐다. 오성산은 금강하구 둑에서 상류방향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산으로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고 큰 산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금강 입구에서 상류방향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오호통재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했다. 누가 다가와서 코를 베어가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금강을 한눈에 보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오성산 정상에는 다섯 개의 묘가 있다. 오성인의 묘다.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러 가다가 오성산에서 짙은 안개에 갇혀 길을 잃었다. 바로 그때 5명의 노인이 나타나자 소정방이 사비로 가는 길을 물었다. 노인들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우리 백제를 공격하러 왔는데 어찌 적에게 길을 가리켜 준단 말이냐!” 하며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소정방이 다섯 노인을 죽였다고 한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돌아가던 소정방이 다시 이곳에 들러 노인들의 충절을 기려 시신을 수습하고 후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그때 이후 이 산의 이름이 오성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 전해 오는 전설이다. 혹시 이 노인들은 백제의 장군들이 아니었을까?   따르면 오성산에서 당나라군을 맞아 결사 항전하다 수 없이 많은 백제군 이 전사했다고 한다.


오성산을 지나 비단강 길로 접어들었다. 군산 금강 하구둑에서 대청댐에 이르는 자전거 길의 이름이다. 금강을 따라 잘 닦여진 길이었는데 비가 오는 을씨년스러운 날이어서 그런지 인적을 찾을  없었다. 인적뿐이랴? 그 많던 가창오리 떼도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모두 제 고향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몇 시간 동안 인적 없는 길을 홀로 걸으며 나포를 지나 웅포에 이르렀다. 저녁식사를 하려고 찾아간 허름한 식당에서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게 됐다. 웅포는 우리말로 곰개나루라고 부른다. 그분들에게 지명의 유래를 물었더니 곰이 금강 물을 마시려고 엎드려 있는 형상과 비슷하다 해서 웅포 즉 곰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강경 못지않은 포구였다는데 지금은 쇠락한 시골 강변마을에 불과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웅(熊)이나 곰’ 자가 들어간 지명이 몇 개나 되는지 아느냐고 물으며 ‘곰’ 자가 들어간 지역은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고 했다. 웅진이 그렇고 웅포가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웅포에는 백제 30대 임금인 무왕의 이야기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어래산성(御來山城)이 있고 어류동(御留洞, 오늘날에는 오류동으로 바뀜)이 있다.

웅포, 곰개나루


다음날,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 또다시 안개가 코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끼었다. 비단강 길에 올라 길을 재촉하다 보니 강변에는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낚시하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들을 뒤로하고 웅포대교를 건너 부여로 접어들었다. 유왕산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숙소를 떠나 2시간쯤 걸어 유왕산 근처까지 왔는데 식당은 고사하고 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꼼짝없이 굶을 수밖에. 주린 배를 틀어쥐고 걷다 보니 공연히 화가 나고 까닭 없는 서러움이 밀려온다. 한 끼 굶었다고 이럴진대 굶기를 밥 먹듯 하면 그 심정은 오죽할까?


마침내 유왕산으로 짐작되는 구릉이 보였다. 해발 60m라고 하니 구릉이 맞는 표현일 게다. 정상에 올라서니 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가 망하고 나서 소정방은 의자왕을 위시해 왕자, 귀족 및 백성 12,807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의자왕이 탄 배가 금강을 따라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이 이곳 유왕산에 올라 대성통곡을 하고 큰절로 의자왕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이날이 음력 8월 17일이었는데 지금도 이 날이 되면 유왕산 추모제가 열린다. 흥미로운 것은 의자왕이 보양식으로 먹었던 웅어들이 일제히 의자왕이 탄 뱃전에 머리를 부딪히며 죽었다는 전설이다. 그때부터 충의를 아는 물고기라고 해서 의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의 우여가 바로 이 물고기다. 매면 4월이면 유왕산 일대 갓개포구에서 우여 축제가 열렸는데 지금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인구가 줄어 행사를 치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갓개포구를 지나 반조원리로 길 머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화가인 겸재 정선이 ‘임천 고암 (林川鼓巖)’이라는 걸작을 그린 곳이 있다. 겸재가 평야지대인 이곳에서 바위를 소재로 한 걸작을 그렸다는 사실도 흥미로웠고, 반조원리 일대가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유신이 만난 곳이라는 주장도 있어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만큼 커지는 것인가? 지형이 변했는지 풍광이 뛰어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겸재의 천재성만 확인했다고 할까? 게다가 반조원리 일대에서 나당 연합군 18만 명이 모일 만한 공간도 찾기가 어려웠다.

 , [임천 고암]


다음 날. 반조원리에서 실망한 탓인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서둘러 배낭을 추슬러 메고 강경포구를 지나 성동면 우곤리에 도착했다. 논강 평야의 한 부분답게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정도라면 나당연합군 18만 명이 주둔하고도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정방은 군산으로 상륙해 놓고 굳이 강을 다시 건너 반조원리로 갈 까닭이 없다. 사비성은 군산과 같은 쪽인 금강의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유신이 강을 건넜다는 기록도 없다. 이곳이 나당연합군이 만나기로 한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더 나아갔다. 석성천이 나타났다. 석성천이 금강과 만나는 지역에는 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습지를 앞에 두고 진영을 설치하기보다는 지나서 설치하지 않았을까? 석성천을 건너니 역시 넓은 들판이 보이고 들판 끝에 우뚝 솟은 산이 나타났다. .  석성산성이 다. 사비성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당군은 조수를 타고 배가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도성으로 나아가 30리쯤 되는 곳에서 멈추었다. 우리 군은 모든 병력으로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곳이다. 백제군은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류하기 전에 선공을 펼쳤으나 대패한 것 같다. 죽은 자가 만여 명이면 공격한 군대도 그 못지않은 피해를 봤을 것이니 아마도 백제의 마지막 저항이 아니었을까? 석성면 봉정리 벌판에서 한바탕 혈전을 치른 뒤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신라군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에서 소정방은 단단히 혼쭐이 난 것 같다. 약속한 날보다 하루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을 참수하겠다며 신라군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던가?

정방이 꺼리는 것이 있어 앞으로 전진하지 않자, 유신이 달래어 신라군과 당군이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나아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7월)


서울에서 군산으로 가는 장항선 열차는 무궁화호나 새마을호나 소요시간이 비슷했다. 사람들이 상위 등급의 열차를 탈 때에는 쾌적성과 함께 빠른 도착도 기대하는 법인데 장항선 열차는 이런 상식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황산벌 전투로만 기억되는 백제의 멸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기록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백제는 당나라를 맞이하여 소정방이 두려움을 느낄 만큼 격렬하게 다퉜다. 승자가 기록한 역사에 이 정도로 표현되었다면 실제는 어땠을까? 금강은 알고 있을 텐데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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