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석계역과 광운대역 사이에는 넓은 철로 부지가 있다. 대부분은 코레일이 철도 관련 시설 용지로 사용하고 있지만, 일부는 자동차 출고장, 물류창고 그리고 시멘트 사일로로 대여해 주었다. 주택가 인접한 곳에 대형차량 통행이 빈발하는 시설이 몰려 있다 보니 오래전부터 이전 요구가 빗발쳤었다. 정치꾼(?)들에게 이보다 더한 호재가 어디 있겠는가? 선거철만 되면 너도나도 민원을 해결해 주겠다며 표를 구걸하곤 했다. 이곳에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와 상업시설을 짓는 사업계획이 수립되어 내년에 착공할 예정이다. 일정에 맞춰 이곳에 있던 업체들도 모두 이전했다.
잠시 찾아온 평온함을 깨고 어느 순간부터 확성기를 통해 시위 현장에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일요일만 빼고 낮 동안 큰 소리로 내내 들려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어있는 물류창고 외벽에는 시뻘건 페인트로 ‘단결’, ‘투쟁’ 혹은 ‘생존권을 보장하라’ 등의 구호가 쓰여있다. 게다가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보이려는지 철로를 향해 수많은 플래카드도 걸려있다. 차량 소음과 분진에서 벗어나니 소리와 시각 공해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구호라도 외치며 시위하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노랫소리만 들려오니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자기들의 요구사항은 플래카드로 대신하려고 하나? 그리고 사업체들은 모두 이전했는데 누구를 향한 시위이지?
어느 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낯선 사내가 불쑥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요즘 시끄러운 노랫소리 때문에 불편하시죠? 여기에 연락처와 전화번호가 있으니 항의 전화하세요.” 얼떨결에 종이를 받으며 “누구신데….”하고 묻자 “노조 조합원입니다.”라며 싱긋 웃으며 다른 사람에게 다가갔다. ‘자기들이 음악을 끄면 되는데 왜 우리에게 항의 전화하라고 하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그가 준 전단을 살펴봤다. 그가 준 종이에는 코레일과 관공서 그리고 시공회사의 전화번호만 적혀있고 물류회사의 전화번호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확성기로 노래를 들려주는 노조가 어느 회사 소속인지 알아보려고 그들이 걸어놓은 플래카드를 다시 살펴봤다. 맙소사! 시위 주체는 물류회사 노조의 상급노조였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들이 보상을 받아내려는 대상도 물류회사가 아니고 코레일과 시공회사인 것 같았다. 과연 물류회사 노조나 상급노조가 제3 자인 코레일이나 시공회사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까? 또 사업주가 떠나간 빈 사업장을 점거할 권리는 있는 것일까? 경위야 어쨌든 그들은 선량한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게 하여 자기들 이익을 취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노조원이라고 했던 사내가 민원 전화하라고 부추긴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 선종 9 산 가운데 하나였던 성주사지에는 고운 최치원의 글이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있다. 비석 끝부분에 ‘他酌不吾醉, 他餐不吾飽(타작불오취, 타찬불오포)’ 즉 ‘술은 네가 마셨는데 내가 취할 리 없고, 밥은 네가 먹었는데 내가 배부를 리 없다.’라는 글귀가 있다. 마치 최치원 선생이 천년 후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글을 지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민들이 재주를 부리게 하고 이득은 자기들이 취하려는 심보를 가진, 참으로 고얀 사람들이다.
오늘도 물류창고 외벽에 설치한 확성기에서는 씩씩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훈아의 ‘테스 형’이나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와 같은 대중적인 노래도 간간이 들려온다는 것이다. 그들 나름의 배려일까 아니면 숨겨진 속셈이 따로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