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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여자의 일생

by 아마도난

영도교(永渡橋)에서 한 살 어린 고운 님과 혼인한 지 2년 만에 이별하고 64년 동안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단종비 정순왕후. 그를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가기 위해 지초(芝草)로 만든 물로 염색 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섬섬옥수 고운 손으로 염색할 때 쓸 물을 떴던 자지 동천(紫芝洞泉)에 이제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자지 동천의 물은 그녀의 눈물이었나 보다. 정순왕후는 자지 동천과 청룡사 그리고 동망봉에 서러운 삶의 흔적을 남겼다. 아니, 모든 것을 용서한 한(恨)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자지동천


15살에 왕비가 되고, 16살에 왕대비로 물러났다가 18살에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노비로 격하되었던 정순왕후. 재색을 겸비(?)한 젊은 그녀를 탐낸 권신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세조는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그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그녀를 달라고 청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계유정난의 일등 공신이었던 신숙주다. 그래서였을까? 세인들은 그의 변절을 비아냥대며 쉽게 상하는 나물에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속설도 전해온다. 이런 기막힌 상황에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중이었고, 뒷방 늙은이였고, 날품팔이꾼이었고, 걸인이기까지 했으나, 어찌 되었든 한때는 만백성의 어머니인 중전이 아니었던가요?’

(김별아 장편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에서)




10월부터 11월까지 두 달 동안 동구릉 숲길 등 조선왕릉 숲길 9개소가 개방되었다. 이 가운데 의릉, 태릉에 이어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을 방문했다. 옹색했다. 정자각의 규모는 다른 능의 절반쯤 되는 규모였고, 홍살문에서 정자각 사이에 깔린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길이도 짧은 데다 중간에 끊겨있었다. 그뿐인가? 수복방과 수라간을 복원하느라 주변도 어수선했다. 더욱 언짢게 하는 것은 그녀의 능침 주위에 해주정씨들의 묘가 있다는 점이었다.


정순왕후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수양아들로 삼은 뒤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82세까지 살았다. 그 세월 동안 세조의 큰아들 의경 세자가 요절하고,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이 계유정난의 일등 공신인 한명회를 부관참시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그녀의 유해는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정씨 선산에 모셔졌다. 살아생전 그녀를 서럽게 했던 운명은 죽어서도 그녀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는지 해주정씨 집안에서 더부살이를 계속하게 한 것이다. 친정이 이미 풍비박산됐으니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숙종 때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위되자 해주정씨는 조상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으나 숙종의 어명으로 중단했다고 한다. 사릉 안에 해주정씨 묘역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같이 산 세월은 짧았어도 정순왕후는 단종을 마냥 그리워했나 보다. 남양주의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정순왕후의 마음을 담았는지 한결같이 영월의 장릉 방향으로만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99년에 사릉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장릉 묘역에 옮겨 심었는데 이 소나무도 장릉을 향해서만 뿌리를 뻗고 있단다.

사릉

무슨 까닭일까? 어미가 알려준 아비를 찾아 신표를 들고 온 고구려의 유리 왕자나, 이공본풀이의 할락궁이 같은 아들이 없던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을 찾아올 아들이 없어서,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소나무가 그 역할을 대신하려 한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단종과 정순왕후를 합장하여 애틋함을 달래줄 수 없으려나? 두 분이 해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사릉 숲길을 걸었다.


이공본풀이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서천(저승) 꽃밭의 사라 도령과 그의 아들 신산만산 할락궁이의 이야기를 담은 제주 신화의 하나. 사라 도령은 서천 꽃밭의 감관을 하러 할락궁이를 임신한 원강아미와 길을 떠난다. 사라 도령은 도중에 재인장자에게 원강아미를 맡기고 신표로 얼레빗 반쪽을 남긴 채 서천으로 떠난다. 훗날 할락궁이는 얼레빗 반쪽을 들고 서천 꽃밭으로 가서 사라 도령과 해후한다. 할락궁이는 웃음 웃을 꽃, 싸움 싸울 꽃, 멸망 악심 꽃을 들고 와 원강아미를 괴롭혀서 죽게 만든 재인장자에게 복수하고, 환생 꽃으로 어머니를 살려내 같이 서천 꽃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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