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 앞마당에서 보이는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대학자 서거정이 동방 사찰 중 최고의 전망이라고 극찬을 할 만큼 멋들어졌다.다산 정약용도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삼락(君子三樂)에 비교하며‘수종사에서 묵으며(宿水鐘寺)’라는 시를 남겼다.이 외에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수종사를 찾아 많은 시, 서, 화를 남겨 놓았다. 이 수종사를 품고 있는 운길산으로 산행을 떠났다.
새벽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모두가 극심한 가뭄을 걱정하고 있었으니 단비임에 틀림없었지만 산행하는 날 내리는 비가 반갑지만은 않았다.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집을 나설 때는 완전히 그쳤다.새벽에 많은 비를 뿌리고 날이 밝으면서 개었으니 글자 그대로 단비였다.가벼운 마음으로 배낭을 메고 운길산역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회기역에 도착했다.
세상에 맙소사! 운길산역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평소 4~5분만 기다리면 탈 수 있었던 전철을 30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결국 이곳이 초행인 사람들은 모두 약속시간을 놓쳐 당초 예정보다 40여분 늦게 산행이 시작되었다.
양수리를 감싸고 있는 운길산은 단풍도아름다웠다. 이 단풍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놈의 저질 체력! 초등학생도, 70살이 넘는 여자분도 느리지만, 꾸준히 산을 오르는데나는 수시로 걸음을 멈추고 가뿐 숨을 진정시켜야만 했다.힘겨운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일행들을 겨우 따라잡았다 싶으면그들은 충분히 쉬었다며 다시 길을 재촉하곤 했다.사람들이 몰인정하기도 하지!
이날 그들은 때때로 쉬고, 나는 한 번도 쉬지 못하는 그런 산행을 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간난신고 끝에 정상에 올라서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으로 인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쾌감이 몰려온다.발아래에는 두물머리 일대가 손에 잡힐 듯이, 곱게 물든 단풍과 함께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져 있었다.맑고 투명한 날씨였다면 더욱 선명한 정경을 즐겼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만했다.
산을 내려오며 수종사에 들렀다.수종사에 도착하자 일행들은 이 절에 얽힌 얘기를 한 마디씩 꺼내 놓았다.어떤 사람은 수종사라는 절 이름이 지어진 내력을 얘기했고,또 어떤 이는 태조 왕건이 다녀갔다고 했다.또 다른 이는 태조 이성계도 다녀갔다고 했다.그러자 그들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어떤 사람이“우리 모두 태조 왕건과 태조 이성계의 기운을 흠뻑 받아갑시다.누가 압니까 좋은 일이 생길지?”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모두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종사 왼쪽 끝자락, 해탈문을 지나면 세조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노란색 용포를 입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다.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하산했다.
가뭄 때문에 단풍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를 나누며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예약해 둔 식당이 나타났다.늦은 점심을 하며 담소를 하다가 황당하게도 전철이 30분 만에 오더라고 얘기를 꺼냈더니일행 몇 사람이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이가 황당하다는 것은 그런 때 쓰는 말이 아니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사전에 전철 운행시간을 확인하고 집을 나섰더라면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으니꼼꼼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설사 전철을 타기 위해 30여분을 기다렸다고 해도그것은 단지 불편한 것이지 황당한 것이 아니라며 질책 아닌 질책을 했다.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은 하면서도 민망한 생각이 들어그럼 어떤 경우가 황당한 것이냐고 물었다.그는 내 질문을 받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다.
지난 4월 5일. 네팔 어린이들을 위해 고르카 지역에 학교를 지어 주기로 하고 기공식을 했단다.원래는 4월 24일에 기공식을 할 예정이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20 여일을 앞당겨서 했다는 것이다.그런데 기공식을 하고 20일이 지난 4월 25일 네팔에 진도 7.8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황당한 것은 지진 발생 이틀 뒤에 전해진 진앙지였다.
바로 고르카였다.
학교 기공식을 한 바로 그 자리가 지진이 발생한 진앙지였던 것이다.
지진이 난 이후에는 대규모 산사태가 고르카 지역을 덮쳤다. 산악지대여서 발생한 참상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제대로 집계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위험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데다 도로가 유실되어 차량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복구공사는 우리가 산행을 하던 그날까지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르카 마을
학교를 지어 준다고 했을 때 너무 좋아 어깨동무를 하며 3일 동안 잔치를 벌였던 주민들의 상당수가
피해를 입어 생사확인이 안 되었다.
그는 그 마을 주민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대피했는지 궁금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잠시 후 그는 황당하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내게 반문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쁨에 겨워 밤새워 함께 춤을 추던 그 사람들이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누군들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그리고 참으로 부끄러웠다. 아침에 전철을 타기 위해 30분을 기다린 것을 두고 황당했다고 한 내 말이그의 귀에는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