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직원들이 통화하는 것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 날만은 통화내용이 궁금했다. 본능적인 예감 같은 것이 작용이라도 한 모양이다.
“어느 분이 네팔에 학교를 짓는 사업에 후원하고 싶다고 합니다. 1억 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며....”
“그래서?”
“학교 하나 지으려면 3억 원 정도는 필요하다고 했더니 아쉬운 듯 전화를 끊었습니다.”
사연인 즉 이랬다. 교직에서 은퇴하신 분이 얼마 전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는 부인 이름이 들어 있는 학교를 짓고 싶어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지인들이 네팔에 학교를 지어 보라는 권유를 했다는 것이다. 수소문 끝에 전화를 했다가 1억 원으로는 학교를 짓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실망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방법을 찾아 주어야만 했다. 직원에게 전화번호를 받아 그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그는 내켜하지 않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학교를 짓기 위해 1억 원은 부족하지만 기숙사나 도서관을 지을 수 있다고, 그렇게 지은 건물에 부인 이름을 넣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히말라야 인근에 있는 학교들은 기숙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며 우리도 적극적으로 후원자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랜 통화 끝에 제안서를 보내 주기로 했다.
얘기가 통하고 나니 마음이 열렸는가 보다. 학교를 짓고 싶어 하는 배경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 놓은 돈이 있는데 이를 허투루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큰돈은 아니지만 부인의 이름이 오래 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방향으로 쓰고 싶어서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화선을 타고 들어오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는 했지만 간절함도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안서가 완성되면 직접 방문해서 설명을 드리겠노라며 주소를 물었다. 그는 방문할 필요는 없으니 우편으로 보내라며 주소를 불러주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 집에 오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쩌면 부인과 사별하고 난 뒤 외부와의 접촉도 많이 줄어서, 그래서 사람이 그리워서 나의 방문을 원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는 전화를 끊으면서 딸이 추천해 주어서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제안서를 만들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워낙 오지가 많아서 위치에 따라 같은 규모의 기숙사나 도서관 신축비용이 2배까지도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서류 봉투에 제안서를 넣고, 그간 재단에서 네팔에 지은 학교들을 설명하는 별도의 자료를 만들어 같이 넣었다. 그리고 간단한 메모 한 장까지. 부인의 이름을 오랫동안 남기고 싶어 하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편으로 보냈다.
제안서를 보내고 며칠이 지났을 때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낯선 부인이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상담을 원한다며 자리에 앉았다. 표정이 밝고 편안한 인상을 주는 부인이었는데 얼마 전 남편을 여의었다고 했다. 살아생전 부부는 네팔에 여러 차례 트레킹을 다녀왔다며 그때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트레킹을 하면서 우리 재단에서 지은 학교도 봤다고 했다.
부인은 남편 이름으로 네팔에 학교를 짓고 싶다고 했다. 12개 정도의 교실을 가진 학교를 짓기 위해서는 3억 원 내외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조사를 했던 것이다. 부인은 그동안 여러 재단들을 방문하여 남편을 기릴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을 논의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정할 수 있게 돼서 홀가분하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느낌이었을까? 뒤돌아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넉넉함이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충격이었다. 사별한 부인을 위해 학교를 지으려는 남편, 사별한 남편을 위해 학교를 지으려는 아내. 그들 부부들은 살아생전 얼마나 금슬이 좋았기에 사별하고 나서도 그 애틋함을 지우지 못하는 걸까? 낯선 사람끼리 만나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살다가 혼자가 된 사람들. 먼저 떠난 배우자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 사람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면 나는 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오래 기억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