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난 Dec 24. 2021

시간이 거꾸로 간다면

“벌써 다 드셨네?” 비워진 접시를 보며 말하자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다 먹었어.”라고 대답했다. 저녁 식사 후 간식으로 떡을 드리자 마치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 것이다. “아들한테 먹어보란 말도 없이 다 드셨어?”하고 말을 하자 “의붓에미인게 벼.”라고 대답한다. “의붓에미였어요? 그럼 나를 어디서 데려왔나?”하고 장난스럽게 묻자 “다리 밑에서 데려왔지.”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다리 밑? 어느 다리?”하고 물으니 “사다리.”라고 대답한다. 왜 사다리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정도라도 대화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정신이 맑지 않은 노모와의 하루가 끝났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지쳤는지 나락으로 떨어지듯,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한기가 느껴지고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오싹해서 눈을 뜨려는데 한쪽엔 천 근, 다른 쪽엔 만 근 추가 달렸는지 눈꺼풀을 밀어 올릴 수가 없었다. 일어나려는데 몸마저 꿈쩍하지 않았다. 순간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안돼,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 질렀다고 생각했다.

몸부림 끝에 겨우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는 나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두려움으로 심장은 터질 듯 격렬하게 뛰었고,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월직 사자인 이덕춘이 날 데려가려고 왔나? 그렇다면 차라리 밝은 날에 일직 사자인 해원맥에게 잡혀간다고 할까? 그러다가 진짜로 해원맥이 오면 어쩌지? 그때는 강림도령에게 잡혀간다고 할까? 짧은 순간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스쳤다. 두렵다고 마냥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어 조심스럽게 다시 눈을 떴다.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숨을 쉬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지나있었다. ‘새벽 2시면 귀신의 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라는데 정말로 이덕춘이 왔다가 해원맥에게 미룬 것은 아니겠지?’ 다시 눈을 감았지만 이미 멀리 달아나 버린 잠을 붙잡을 수 없어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아이가 태어났다. 녀석은 인간 세상의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대로 살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잤고,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아이를 감당하려고 아내는 저녁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12시를 넘겨 녀석이 잠들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버텼다. 그 이후부터 아침까지는 아내가 선잠을 자며 아이를 돌봤다. 네발로 기어 다니던 아이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할 때까지 그렇게 우리 부부는 밤을 나누어 5시간 남짓씩 자며 아이를 키웠다. 항상 모자라는 잠 때문에 피곤해하면서….


어머니는 점점 어린아이와 비슷해져 갔다. 밤낮도 구별 못 하고, 본능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이 영락없는 어린 아이다. 그 모습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소설의 내용과도 비슷했다. 80세의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벤자민 버튼은 부모에게 버려져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함께 지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져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판타지 소설이다.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아이를 양육하고, 갓난아기의 모습이 된 노인을 봉양하는 세상이라…. 이렇게 되면 스핑크스의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인 짐승은?’이라는 수수께끼는 ‘아침엔 세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네 발인 짐승은?’이라고 바뀌어야겠지.


네발로 기어 다니는 아이를 키울 땐 힘들어도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면서 세 발이 된 노모를 봉양하게 되자 힘들다는 불평이 입에 붙었다.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궁리도 했다. 만약에 시간이 거꾸로 가면, 그래서 어린아이가 된 노모를 봉양하게 되면 기꺼이 받아들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핑계를 댈까? 변덕스러운 내가 밉다. 이러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처럼 제 부모를 소홀히 한 벌을 받지는 않을는지….

매거진의 이전글 법도 윤리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