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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Apr 10. 2022

어미의 마음

어머니 물건을 정리하다 문갑 서랍에서 반으로 접힌 지방(紙榜)을 발견했다. 그냥 버리려다 무심코 펼쳐 본 뒷면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생이 쓴 것처럼 삐뚤빼뚤한 글자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화부시고 용서핬세요. 제 무어서 잘못했는지 모으겠습니다. 도아주요. 제가 다 잘모하였습니다. ○○이 배필을 도아주세요. 어먼님.’ 맞춤법은 물론 띄어쓰기도 되어 있지 않아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문 같은 글이었다. 여러 차례 읽고서야 겨우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어머니가 쓴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 글쓴이를 알고 나니 두려워하면서 글을 쓰는 어머니의 모습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어머니의 삶도 보였다.



대학을 나온 아버지와 초등학교를 중퇴한 어머니의 만남은 스트레스의 시발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글을 겨우 깨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시작한 서점은 공포였다. 그 당시에는 중고등학교 참고서 이름에도 한자가 많이 쓰였는데 한글도 겨우 읽는 사람에게 한자로 가득한 책은 그 자체로 공포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한자를 깨우치는 대신 자주 팔리는 책 이름을 그림 형태로 기억했다. 이를테면 ‘數學의 定石’을 달라고 하면 책을 내주었으나 ‘수학 참고서’를 달라고 하면 ‘없다’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었고…. 아버지가 외출하면 책을 못 팔까 봐, 같이 있으면 핀잔 들을까 봐 긴장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어머니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으리라.


아버지가 서점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머니도 고추, 당추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를 했다. 할아버지의 첫 번째 할머니는 아버지를 포함하여 아들 셋을 낳고 돌아가셨다. 재혼한 할아버지는 아들 넷을 더 두었다. 그 무렵 많은 사람이 그랬듯 어머니도 호된 시집살이를 했다. 특히 끼니때마다 한 사람 분량의 밥이 모자랄 정도로 식량을 내주는 시어머니 때문에 어머니는 누룽지나 남들이 남긴 밥으로 겨우 허기를 면했다고 했다. 늘 배가 고팠던 어머니는 ‘나도 먹고살아야겠어유!’라며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밥그릇에서 다짜고짜 한 숟가락씩 덜어서 먹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차라리 공장에 다니겠다며 서울의 친척 집으로 달아났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시집살이가 매워서 그랬을까? 분가해서 부여로 이사하고부터 어머니는 할머니를 거의 찾지 않았다.


어머니가 글을 적은 종이는 할아버지와 두 분 할머니 합동 제사 때 쓸 지방이었다. 그 지방의 뒷면에 글을 적은 것이다. 내용으로 미루어 글은 어머니가 섬망 증상에 시달리던 시기에 쓴 듯했다. 그 무렵 어머니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낯선 어린아이가 다짜고짜 집에 들어와 같이 살자고 한다며 두려움 속에 매일 불교방송을 보곤 했었다. 첫 번째 시어머니는 본 적이 없으니 찾아온 분은 둘째 시어머니였을 것이다. 시어머니와 어린아이 귀신(?)은 1년여를 머물다가 사라졌고, 그들이 떠나자 어머니도 더는 섬망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삶의 끝자락에 가까워지면서, 한 줌밖에 남아있지 않은 의식마저 혼미해지면서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마음 정리를 한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막내아들의 결혼이 절실해서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한 것 같았다. 좋은 감정보다는 미운 감정이 많았을 시어머니에게 용서를 빈 것도 행여 도움이 될까 싶어 그랬는지 모르겠다. 죽기 전에 자식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어미의 마음 그대로.


섬망 : 갑작스러운 의식의 변화와 함께 주의력·인지기능 장애가 생기는 일시적 상태. 원래 치매가 있었거나 신체 상태가 저하됐을 때 발생 위험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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