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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잃으면

by 아마도난

그리스·로마신화의 주신 제우스에게 거인 신 티탄들이 반기를 들었다. 치열하게10여 년 동안 계속된 싸움은 티탄 가운데 일부가 제우스 편으로 돌아서면서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티탄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끝까지 저항한 거인이 아틀라스다. 힘겹게 티탄들의 반란을 제압한 제우스는 끝까지 저항한 아틀라스에게 하늘을 떠받치는 벌을 내렸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이가 아틀라스뿐일까? 치마를 만들려면 광목 9만 통이 필요한 여자 신과 그에 못지않은 남자 신이 있다. 광목 9만 통을 길게 이으면 오늘날 기준으로 1,600Km가 넘는다. 이 정도면 아틀라스보다 클까 작을까? 여자 신은 산과 벌판, 호수와 바다, 강 등 세상을 만들었다. 여자 신이 세상을 만드는 동안 남자 신은 어깨로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세상이 만들어지자 여자 신은 사라져 버렸고, 남자 신은 꼼짝없이 오늘까지도 하늘을 받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깨가 아파진 남자 신은 하늘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 어깨로 바꿔 들었다. 그때마다 하늘이 흔들리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땅이 흔들리며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했다. 흔들림 없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보다 훨씬 인간적이지 않은가? 이 거인 신들은 우리나라의 마고와 장길손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신은 제우스다. 지옥을 다스리는 신은 누구일까? 제우스의 형 하데스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신이 있을까? 있다. 이승을 다스리는 신은 소별왕, 저승을 다스리는 신은 형인 대별왕이다. 공교롭게도 그리스·로마신화와 구조가 같다. 다만 우리나라의 대별왕은 하데스와는 달리 합리적이고 착하다는 차이가 있다. 사기, 협잡, 폭력 등이 난무하는 이승보다 저승이 질서가 잘 잡혀있다는 생각의 반영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많은 일이 벌어지고, 많은 이야기가 생겨난다. 그것이 전해지고 각인된 곳이 우리의 유전자다. 또한 조상님들의 삶이 글로 전해지면 역사가 되고 말로 전해지면 신화가 된다. 신화는 말로 전해온 것이니 변이가 많다. 비슷한 이야기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이유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사건의 순서가 바뀐 이야기가 발견되는 이유다.


수천 년간 전해오며 우리 정신의 원형질이 된 신화. 그 신화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우스나 비너스 혹은 헤라클레스를 아는 사람은 많다. 어려서부터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으라고 권장한 결과다. 그들은 자청비, 바리, 오늘이, 당금이도 알까? 안타깝게도 우리 신화를 아는 이보다는 그리스·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 친숙한 이가 더 많다. 우리 신화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고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신화를 잃는 것 못지않게 큰 문제는 언어를 잃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원형질을 더는 이어 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두 번이나 지배한 만주족은 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잃고 한족에게 동화되었다. 반면 히브리어를 지켜낸 유대인들은 불과 600만 명의 인구로 3억 명의 아랍인들 틈바구니에서 강고한 나라를 유지하고 있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말을 말살하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언어가 사라지면 문화가 희석되고, 결국 민족성도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적 언어 소멸정책도 극복해 낸 우리가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말을 소멸시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말을 존중하기는커녕 외래어, 외국어는 물론 비속어들을 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등 뿌리 깊은 언어 사대주의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언어전문가들은 100년 안에 지구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2/3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행여 우리말이 그 속에 포함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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