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트이슐에 온 것은 순전히 시씨(Sissi) 때문이다. 물론 바트이슐이 교통의 요지이고, 잘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로 가는 환승역이 있는 곳이라는 점도 이유의 하나이긴 하다. 시씨는 오스트리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엘리자베스 황후의 애칭이다. 그녀의 결혼은 극적이었다. 시씨는 언니인 헬레나가 요제프 황제와 약혼식을 하려고 바트이슐에 왔을 때 따라왔다. 그곳에서 그녀에게 반한 황제와 갑작스럽게 약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약혼식을 치른 황제는 15세의 시씨와 함께 바트이슐의 카이저 빌라에 머물며 인근의 할슈타트나 고자우 호수 등지에서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달콤한 생활은 금세 끝났다. 뮌헨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시씨는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빈 궁정의 법도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아들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와의 관계도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결혼식을 마치고 2주가 지났을 때 ‘작은 새는 새장 안으로 날아들었고 철창문은 닫혔습니다. 나의 동경은 점점 커지기만 합니다. 자유, 당신은 나를 외면했어!’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시씨는 힘들어했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혹시 시씨의 삶에서 영국 다이애나비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는가? 요제프 황제가 헬레나 대신 동생인 시씨와 결혼했듯이 찰스 왕세자도 사라 대신 동생인 다이애나와 결혼했다. 시씨가 오스트리아 궁정의 엄격한 법도에 힘들어했듯 다이애나도 영국 왕실의 보수적이고 엄격한 법도에 힘겨워했다.
이뿐인가? 자유분방한 삶을 쫓던 시씨는 궁전 생활의 답답함을 피하고 시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 여행을 즐겼다. 경호원 없이 시녀만 데리고 스위스를 여행하던 시씨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궁정 밖 생활을 좋아했던 다이애나도 파파라치를 피하려다 자동차 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신데렐라처럼 등장했다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두 여인. 기가 막힌 행운을 만난 여인처럼 보였는데 사실은 불행한 팔자였던 모양이다.
오스트리아 여행은 시씨의 삶을 쫓는 여행이기도 했다. 바트이슐에서 느낀 그녀의 향기는 빈의 호텔까지 따라왔다. 근처 공원에 그녀의 작은 동상이 세워있었기 때문이다. 호프부르크 궁과 쇤부른 궁에는 화려하지만 우울했던 그녀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프부르크 궁 옆에 있는 시민공원(Volksgarten)에는 ‘잊지 못할 황후 엘리자베스에게 오스트리아 국민이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으로 1907년에 이 기념비를 세운다.’라고 새겨진 대리석 기념비가 있다. 그 앞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당대 최고의 미녀로 신데렐라처럼 등장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안쓰러워하고 도와주려 했던 서민에게 암살당한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심금을 울린 모양이다. 1898년에 사망한 시씨,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997년에 다이애나비가 죽었다. 다음 100년 뒤에는 어떤 여인이 나타나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까?
시씨나 다이애나에게만 극적인 인연이 있었을까? 소개받기로 한 여자를 대신하여 나타난 여인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있다. 이런 인연이라면 황제나 왕세자급 남자라고 우쭐댈 만하지 않은가? 시씨나 다이애나는 시댁의 분위기에 짓눌리다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우리는 그런 일없이 잘살고 있다. 이쯤이면 ‘내가 제일 잘 나가!’라며 외칠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