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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May 28. 2024

개근 거지

스위스 여행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 초등학생 아들이 동급생들로부터 ‘개근 거지’라는 놀림을 받고 있다는 가장의 사연이 전해졌다. 개근 거지는 학기 중 해외여행 등 체험학습을 가지 않고 꾸준히 등교하는 학생을 비하하는 신조어다. 아이의 아버지는 ‘요즘은 정말 비교문화가 극에 달한 것 같다. 결혼 문화나 허영 문화도 그렇고 참 갑갑하다. 사는 게 쉽지 않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신문기사에서)


아이의 아버지 심정에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성실함의 대명사라며 우등상보다 더 값지게 여기기도 했던 개근상이 거지로 전락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충격적이다. 그뿐인가? 남들과 비교하는 일에 익숙하고 허영과 과시가 몸에 밴 채 자란 아이들이 이끌어갈 미래 사회도 걱정이다.


스위스의 루체른 외곽에 높이가 2,132m인 필라투스 산이 있다. 루체른 중앙역에서 버스 타고 10여 분을 가면 필라투스 산 입구인 크리엔스에 도착하는데 여기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1,416m 높이에 있는 프래크뮌테크까지 오른다. 이곳에서 다시 케이블을 갈아타고 필라투스 정상까지 가는 것이다. 필라투스를 오르는 또 다른 방법은 산악열차를 타는 것이다. 최고 경사가 48도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열차다. 이 열차는 여름에만 운행되는데 내가 스위스를 떠나는 다음날부터 운행이 재개되어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아무튼 높은 산이기는 하지만 마치 서울 근교의 도봉산 같아서 많은 시민이 찾는 곳이었다.



프래크뮌테크에 드래건 글라이더(Dragon Glider)라는 놀이시설이 있다. 5~10m쯤 되는 높이의 나무 기둥들을 곳곳에 세워 두고 다양한 형태의 줄을 매어놓았다. 기둥 사이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은데 집라인을 타거나, 매달아 놓은 통나무를 밟으며 건너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동하도록 한 것이다. 두려움도 없애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요령도 일깨워주는 놀이시설 같았다. 필라투스에 오르려고 프래크뮌테크에 도착했을 때 마침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50여 명의 아이가 놀이시설을 즐기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전요원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지만 지켜보기만 할 뿐 아이들이 줄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자율적이었다. 미리 교육을 받았는지 침착하게 안전고리를 걸고, 앞서간 아이가 안전하게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두려워서 중도에 포기한 아이도 있었지만 거의 다 완주하는 듯했다. 그렇게 놀이시설을 완주한 아이들은 한쪽 편에 마련된 바비큐장에서 불을 피우고 소시지 등을 구워 먹으며 놀았다. 이때도 지도교사나 안전요원들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간여하지 않았다.


일정을 모두 마친 아이들은 케이블카를 타는 대신 대열을 지어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400m쯤 아래에 있는 크리엔세레크까지 걸어가서 케이블을 타려나? 조잘대며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이 느껴졌다. 그들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로 향했다.


‘개근 거지’라는 인터넷 기사를 보며 스위스 아이들의 밝은 모습과 대비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을 순례하는 아이들이, 표정 없이 우울해 보이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런 그들에게 누가 허영과 과시를 가르쳤는가? 누가 그들에게 겉모습으로 사람을 차별하도록 가르쳤는가? 우리 자연도 스위스 못지않은데 그곳에서 자라는 인걸은 왜 그리도 다른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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