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올 4월이면 결혼한 지 40년이 된다. 결혼 40주년, 서양에서는 열정, 사랑 그리고 용기를 상징하는 루비에 빗대어 루비 혼이라고 부른다. 두 영혼이 서로를 비추며 붉게 타오르는 순간, 사랑이 운명이 되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는 한 줄기의 빛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고 결혼하여 40년이 지나 운명이 되니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된다. 사랑은 루비와 닮았다. 상처처럼 붉지만, 세월 속에서도 가장 오래 빛나는 보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간은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좋았던 날보다 버텨낸 날이 많았고, 다정한 말보다 침묵이 길었던 저녁도 많았다. 서로를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가장 쉽게 상처 주었고, 가장 믿는다는 이유로 가장 늦게 사과했다. 비록 오랫동안 티격태격 살았지만 우리는 늘 같은 쪽에 서 있었다. 떠나는 쪽이 아니라 남는 쪽에, 돌아서기보다 다시 마주 서는 쪽에. 그래서 사랑은 오래도록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를 돌아보는 이번 여행은 축하이면서 확인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삶의 길을 함께 걷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지에 대한…. 이번 여행의 주제를 사랑으로 정한 이유이다. 오래된 이야기들이 천천히 숨 쉬는 도시와 마을을 지나며, 사람들이 남기고 간 사랑의 흔적을 하나씩 건져 올리고, 그 곁에 우리의 시간을 나란히 놓아보려 한다.
보랏빛 들판이 바람처럼 이어지는 프로방스에서, 그리고 오래된 성벽과 골목이 저녁 빛에 잠기는 아비뇽에서 우리는 서로의 걸음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늘 반걸음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다가도 상대방을 돌아보는 그 걸음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젊은 날의 얼굴은 사라졌지만, 더 원숙해진 얼굴로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하는 자리에서는 바다와 오래된 골목이 맞닿은 도시 제노바가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엄마 찾아 머나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여행을 떠난 마르코의 흔적을 찾느라 층층이 포개진 집들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빛 속에서 발걸음이 조금 느려질지도 모르겠다. 지중해에서 동방무역의 패권을 두고 쌍벽을 이루던 베네치아와 비교하느라 제노바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몸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이탈리아에서는 사랑의 이름이 다양하게 들린다. 전설 속 연인의 도시 베로나에서 사람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허락하지 않아도 서로를 선택한 사랑을 떠올린다. 그래서 베로나를 영원하지만 슬픈 사랑의 도시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로나의 사랑은 짧았기에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사랑, 세월이 지나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다.
볼로냐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 대학이 있다. 이곳의 사랑은 같은 책을 읽고, 같은 광장을 걷고 같은 계절을 몇 번이나 함께 지나면서 시작된다고 한다. 볼로냐의 사랑은 처음부터 운명처럼 불타오르기보다 시간 속에서 서서히 깊어지는 사랑이라고 한다. 베로나의 사랑이 불꽃이라면 볼로냐의 사랑은 세월이라고 한다.
여행지에 전해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는 늘 선명하다. 이별과 재회, 희생과 약속이 극명하고 감동적이다. 프로방스의 햇살과 북이탈리아의 돌빛 사이를 걸으면 우리의 사랑도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한 장면이 아니라, 수없이 겹쳐진 생활의 장면들이라는 것을 깨달을까? 이번 여행에서 특별한 사진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대신 같은 벤치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싶다. 라벤더 향이 지나간 자리에서, 호숫가의 바람이 머무는 오후에, 서로의 하루를 조금 더 오래 듣고 싶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천천히 나누고 싶다. 서로의 걸음이 어긋나지 않도록 말없이 속도를 맞추면서. 이제는 앞서거나 뒤처지기보다 나란히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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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함께해 온 사랑을 조금 더 로맨틱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기 위한 여정이다. 그리고 여행을 마칠 무렵 이탈리아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그리고 생각보다 깊이, 서로를 사랑해 왔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