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는 인연

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by 아마도난

몇 해 전, 프랑스 안시의 호숫가를 걸었다. 물빛은 투명했고, 공기는 가벼웠다. 여행은 충분히 즐거웠지만 마음 한편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있었다. 지도 위에서 30분 거리,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샤모니 몽블랑 때문이었다. 일정이 빠듯하고 안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어서 이미 보고 느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포기한 곳이다. 다녀온 곳은 사진이 되고, 기억이 되지만 가지 못한 곳은 질문으로 남는다. 왜 그때 가지 않았는지, 다음에는 갈 수 있을지…. 여행이 끝난 뒤, 다녀온 풍경보다 가지 못한 곳의 이름이 오래 남았다.




샤모니를 품고 있는 몽블랑은 유럽의 지붕이라 불린다. 오래전부터 이곳에는 산이 사람을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빙하의 정령이 사람의 마음을 가려 본다는 설화도 있다. 욕심으로 오르는 자에게는 구름이 길을 막고, 스스로를 낮춘 자에게만 봉우리를 잠시 허락한다는 이야기다. 그 전설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상징이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자리라는 것.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처음부터 그 이름을 일정에 넣었다. 출발지는 제네바. 국경을 넘어 샤모니에 들렀다가 남쪽의 아비뇽으로 내려가는 여정이었다. 지도 위의 선은 간결했지만 실제의 시간은 간결하지 않았다. 이동 거리와 숙박 일정, 체류 시간과 동선의 균형을 따져보는 동안 샤모니는 점점 무게가 되었다. 넣으면 다른 하루가 밀려났다. 결국 그 이름을 다시 지웠다. 효율 때문이라지만 그보다는 몽블랑이 나를 부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직 마음이 준비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스쳤다.


밀라노 북쪽에 있는 마조레 호수 역시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오래전 밀라노에 출장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들른 곳이다. 첫인상이 강렬했다. 호수 안에 있는 3개의 섬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이졸라벨라에 매료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아내와 함께 오고 싶었다. 그 뒤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은 방문하지 못했다. 이번 여행에는 반드시 방문하려 했지만, 또다시 포기해야 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축제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와 겹치면서 호텔 숙박료가 평소보다 10배 가까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샤모니도 마조레 호수도 실제의 장소라기보다, 유예된 목표처럼 느껴졌다. 도달하지 못한 욕망,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질문. 다녀온 곳은 기억으로 닫히지만, 가지 못한 곳은 열린 채로 남는다. 몽블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마조레 호수도 이졸라벨라 섬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인연이 닿겠지? 이와 더불어 아무리 노력해도,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있음을 샤모니나 마조레 호수가 깨닫게 해 줬다. 어쩌면 도착함으로써 완성된 것보다 도착하지 못해서 남은 애틋함이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하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거나 실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몽블랑과 마조레 호수 덕분에 깨달았다. 닿지 않는 인연이 아니라 깨닫게 해 준 인연이다. 언젠가, 맑게 갠 날에 몽블랑이 흰 봉우리를 드러내고 있다면 말하리라. “이제는 갈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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