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여행 그리고 기억
제네바 호수 앞 브런즈윅 기념비 바로 옆에는 시씨 황후가 암살당하기 직전 묵었던 보 리바쥬 호텔이 있다. 이 호텔 바로 앞 선착장에서 시씨가 암살당했고 그 자리에 그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시씨는 엘리자베스 오스트리아 황후의 애칭이다.
그녀의 결혼은 극적이었다. 시씨는 요제프 오스트리아 황제와 약혼식을 하려고 바트이슐에 온 언니 헬레나를 따라왔다. 약혼식 전날, 시씨를 처음 본 황제는 그녀에게 반해 모후의 완강한 반대에도 헬레나 대신 15세의 시씨와 약혼식을 올렸다. 이어 이듬해에 결혼식까지 거행했다.
준비되지 않은 결혼이었을까? 자유분방한 성격의 시씨는 궁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2주가 지났을 때 ‘작은 새는 새장 안으로 날아들었고 철창문은 닫혔습니다. 나의 동경은 점점 커지기만 합니다. 자유, 당신은 나를 외면했어!’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시씨는 궁궐생활을 힘들어했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시어머니와의 갈등마저 겪던 그녀는 평생의 대부분을 여행하며 비엔나 밖에서 보냈다. 황제는 그녀가 곁에 없음을 늘 그리워하며 편지를 썼고, 그녀가 여행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군말 없이 지원해 줄 정도로 변함없이 사랑했다.
제네바에서 시씨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황제는 죽을 때까지 집무실 책상 위에 시씨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그녀를 그리워했다.
시씨가 묵었던 보 리바쥬 제네바(Beau-Rivage Genève) 호텔에는 그녀를 기리는 '엠프레스 시씨 스위트(Empress Sissi Suite)'가 있다. 이 객실은 그녀가 머물렀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으며, 제네바 호수가 보이는 프라이빗 테라스와 대리석 욕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시씨 황후 동상에서 10여분쯤 걸어가면 루소 섬이 나온다.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장자끄 루소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섬 안에는 루소의 동상도 있다.
폭력적인 스승 밑에서 도제생활을 했던 루소는 16세에 제네바에서 도망쳐 나와 안시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28세의 젊고 아름다운 바랑 부인(Madame de Warens)을 만나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루소는 그녀를 '엄마(Maman)'라고 불렀고, 그녀는 루소를 '자기(Petit)'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두 사람의 관계가 모성애적 보호와 연인 간의 감정이 뒤섞인 묘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샹베리 근처의 '레 샤르메트(Les Charmettes)'라는 전원 저택에서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루소는 "내 인생은 오직 이때뿐이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그에게는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바랑 부인은 이곳에서 루소에게 음악, 철학,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 훗날 위대한 사상가가 될 기틀을 닦을 수 있게 했다.
바랑 부인은 성(性)에 대해 매우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이었다. 당시 바랑 부인에게는 '클로드 아네'라는 연인이 있었는데 루소가 성인이 되자 루소와도 연인 관계를 맺었다. 루소는 아네에게 경쟁심이나 거부감을 갖기보다 바랑 부인을 공유하는 기묘한 관계를 유지했다.
루소는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에서 큰 쾌락을 얻기보다 오히려 "근친상간을 하는 듯한 슬픔"과 묘한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에게 바랑 부인은 육체적 대상 이전에 영혼의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루소가 유명해진 뒤 다시 찾아갔을 때, 바랑 부인은 몰락하여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루소는 당시 자신의 처지도 여의치 않았고, 새로운 연인인 테레즈도 있어서 예전처럼 그녀를 돌보지 못했다. 결국 바랑 부인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루소는 말년에 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그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그녀를 향한 영원한 사랑을 다시 한번 고백했다.
루소의 사랑 이야기는 훗날 유럽 낭만주의 문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사랑은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시씨와 루소.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는 달랐지만 비슷한 삶의 궤적이 느껴진다. 자유분방한 시씨는 평생을 여행하며 살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황제의 곁에 없었지만 황제는 항상 그녀를 그리워했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마치 밀어내도 시씨를 향해 황제의 마음이 다가가게 하는 구심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루소의 삶도 비슷하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성적으로 자유분방했다. 심지어 바랑 부인은 루소와 안네를 동시에 사랑하고 육체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도 루소는 바랑 부인을 떠났다가 훗날 자석에 끌린 쇠붙이처럼 그녀 곁으로 돌아온다.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시씨 황후와 바랑 부인. 그녀들에게는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남자들이 있었 다. 그녀들이 원하는 만큼 멀리 가게 두지만, 시선만큼은 늘 그 끝에 닿아 있는 요제프 황제와 루소가 그들이다. 어쩌면 요제프 황제와 루소는 멀리 떠난 이가 길을 잃지 않도록, 혹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사랑을 위해 밤새 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고독한 수호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