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은 새로운 곳을 찾아간다는 설렘과 익숙한 곳을 벗어난다는 불안함이 엇갈리는 교차로다. 설렘을 안고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한 것은 월요일 오후 1시쯤이었다. 악명 높은 출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을 피할 수 있는 시간대여서 호텔까지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택시요금이 300밧(원화 약 10,000원)을 넘지 않는다는 인터넷 정보도 한몫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올라선 택시는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했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느긋하게 즐기는데 기사가 50밧을 달라고 했다. 톨게이트 비용이었다. 잠시 후 다시 25밧을 달란다. 역시 톨게이트 비용이었다. 돈을 건네주다 택시미터기를 봤다. 호텔까지 제법 거리가 남은 것 같은데 300밧을 넘어가고 있었다. ‘많은 기사들이 미터기 조작을 한다더니 이 사람도 그런 부류인가?’하며 의심하고 있는데 기사가 앓는 소리를 했다. 최근에 차를 새로 샀는데 매달 내야 하는 할부금이 20,000밧(한화 약 70만 원)나 된다며 요금의 10%쯤을 팁으로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미터기에는 거의 500밧이 표시되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기사의 간절한 눈빛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사라져 가는 택시를 따라 여행도 설렘에서 불안함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왕궁 관람을 마치고 세계 최대의 명상센터인 왓 마하탓으로 가던 날이었다. 오후 2시쯤 근처에 도착하여 두리번거리자 미모의 여인이 다가와 왓 마하탓은 이미 문을 닫았다며 왓 아룬(새벽사원)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문을 닫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주변을 살피다 ‘왓 마하탓 4번 Gate’라고 쓰인 안내판을 발견했다. 그 밑에 있는 출입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여인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4번 Gate로 들어섰다.
왓 마하탓을 둘러보고 반대편으로 나왔더니 잘 관리된 동상이 있었다. 누구를 기리는 것인지 살펴보려고 다가가자 갑자기 인도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우리가 왕궁을 찾는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이미 문을 닫았다며 왓 아룬으로 가라고 권유했다. 이들은 외국인들에게 바가지 관광을 시키려는 사기꾼(?)들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불쾌한 일을 연거푸 겪다 보니 짜증이 나서 들은 척도 안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마침 벨보이가 손님을 위해 택시를 잡아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공항까지 택시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물었더니 대략 500밧 정도란다. 거듭 확인했지만 그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맙소사! 공항에서 호텔까지 태워준 선량한 기사를 미터기 조작이나 하는 파렴치범으로 오해했다는 말이 아닌가?
10월 13일. 시리랒 병원으로 향했다. 샴쌍둥이 등 희귀한 해부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의학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병원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병원 유니폼 치고는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며 박물관으로 가니 휴관이었다. 허탈하게 돌아서며 차오프라야 강 맞은편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주변도 노란색 물결로 가득했다. 필시 곡절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박물관 입장권을 사며 이유를 물었다. 푸미폰 국왕(라마 9세) 서거 2주기를 맞아 대부분의 태국 사람들이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상의를 입고 그를 추모하는 것이란다. 태국에 있는 대부분의 대형병원은 왕실에서 건립했는데 시리랒 의학박물관이 휴관한 것도 푸미폰 국왕을 추모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시리랒 병원의 푸미폰 국왕 추도식 [연합뉴스]
말을 마치며 박물관 직원은 도시락 2개를 내밀었다. 기일을 맞이하여 왕실(?)에서 도시락을 나눠줬는데 자기들이 먹으려고 받아두었던 것이란다. 방콕이 ‘천사의 도시’ 혹은 ‘기쁨의 도시’라는 뜻이라더니 역시 ‘방콕’이었다. 도시락에는 흰쌀밥과 소고기 조림이 담겨 있었다. 밥이 따뜻하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첫 번째 젓가락으로 밥을 뜨며 500밧을 먹었다. 두 번째 젓가락으로는 300밧을 넘겼다. 곁들여 나온 쇠고기를 씹으며 ‘거짓 정보 때문에 품었던 의심’을 삼켰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호텔을 출발한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켜지 말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비용을 포함해서 500밧에 가자고 제안했다. 호의(?)를 거절하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미터기에는 297밧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