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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Jun 05. 2019

한 수 위?

이탈리아 여행

2015년 초. 아내와 이탈리아여행을 가려고 연초부터 준비했다. 항공권과 호텔은 물론  4개월 전 예약하면 최대 70%를 할인해 준다는 열차도 날짜를 짚어가며 예약을 마쳤다. 일찍부터 두른 덕에 꽤 큰돈이 절감되었다. 일정을 짜는 동안 가슴이 설레었고, 이제야 남편 노릇 한번 제대로 한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 들었다. 한편으로는 절감된 비용을 계산해 보며 부지런한 새 (Early Bird)가 먹이를 먹는다더니 리보고 하는 얘기 같다며 마주 보고 웃기도 했다.


출발일자를 손꼽아가며 기다리는데 갑자기 메르스 사태가 전국을 공포로 몰고 갔다. 하루가 다르게 환자가 발생하고 매스컴에서는 허둥대는  정부를 질타하며 사태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던 한국인이 입국과 동시에 한동안 격리되었다는 기사를 보며 여행을 강행할 것인지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여행을 포기하면 출혈이 너무 컸다. 비용을 줄이려고 호텔도 열차도 취소 불가능 조건으로 예약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새가 아니고 일감치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가 새에게 잡아 먹힌 부지런한 벌레였나? 비용을 아끼려고 서둘렀다가 진퇴양난에 빠져버렸다.






이탈리아 여행을 구상하게 된 것은 아내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라노에 출장을 갔다가 짬이 생겨 반나절 동안 들렀던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였다.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1시간 남짓 가면 나타나이탈리아 알프스 기슭에  있는 호수다. 수도 알프스도 아름다웠지만 호수가 품고 있는 섬에 더욱 매료됐었다. 쩌면 틈새 시간에 들러서, 다시 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마조레 호수는 세 개의 섬을 품고 있었다. 공주의 섬이라는 이졸라벨라(Isola Bella), 공주의 엄마가 사는 섬이라는 이졸라마드레(Isola Madre) 그리고 어부의 섬이라 불리는  이졸라페스카토리 (Isola dei Pescatori)가 그것이다. 세 개의 섬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이졸라벨라.


이 섬에는 1632년 카를로 3세가 그의 아내 이자벨라를 위해 지은 보로메오(Borromeo) 궁전이 있다. 그때까지 내가 본 유럽의 궁전 중에서 이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곳은 없었다. 호숫가에서 섬까지는 보트로 약 10분쯤 걸렸는데 섬에 다가갈수록 나타나는 멋진 조경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다. 호기심에 서둘러 섬에 오르자 하얀 공작새가 깃털을 활짝 펴고 환영하듯, 시위하듯 불쑥 나타났다. 잘 관리된 정원수와 각종 조각들로 장식된 정원은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 화보였다. 보로메오 궁전으로 들어갔다. 방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찬사가 절로 나왔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기획을 하고 건축을 했는지 그의 천재성에 새삼 놀라곤 했다. 그야말로 별세계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무솔리니가 별장으로 사용했고,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위한 첫 번째 회담이 열렸다는 그 궁전을 보며 화려함에 놀라 동행한 직원에게 말했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궁전을 짓고 나면 웬만한 나라는 거덜 나겠다."






이탈리아 여행을 생각하면서 왜 이졸라벨라를 떠올렸을까? 아니 이졸라벨라를 가려고 이탈리아 여행을 구상한 것은 아니었을까? 자칫하다가는 카를로 3세와 비교돼서 두고두고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해 줄 수 없으니 그곳에 가서 잠시나마 카를로 3세와 이자벨라 흉내라도 내며 정신적 사치라도 해보려고?


다행히 메르스 사태가 진정되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부지런한 벌레는 아니고 새였던 모양이다. 여행 일정을 거의 마치고 귀국하기 하루 전 날, 아내는 짐짓 마조레 호수를 외면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고 시간이 흘러 여행이 주는 즐거운 여운도 사그라지자 아내는 마조레 호수에 데려가지 않았다며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친다. 마조레 호수를 외면한 이유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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