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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Jun 13. 2019

아는 만큼 보인다

독일 여행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인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여행기간이 20일을 넘어가니 몸도 마음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등을 떠밀려 떠나온 여행이 아닌데, 그래서 아직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라지면 안 되는데 몸이 지쳐가니 의욕도 떨어졌다. 사실 여행을 계획하면서 프랑크푸르트를 포함한 것은 이 도시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주변에 있는 하이델베르크나 뤼데스하임에 가기 위한 거점의 의미가 더 컸다. 그 계획이 피곤함 때문에 흔들린 것이다. 주변 도시로의 여행을 포기하고 남은 시간은 휴식을 겸해서 느릿하게 보내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를 천천히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뢰머광장 (Römerberg)으로 갔다. 뢰머는 '로마'의 독일어 표현으로 로마군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세시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시청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뢰머광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라는 명성에 걸맞은 북적임이었다.


뢰머광장


뢰머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카이저 돔 대성당이 있다. 서기 1355년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한 유서 깊은 성당이다. 1562년부터 1792년까지 230년 동안에는 황제의 대관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인 것은 분명한데 한편으로는 세습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황제가 선출된다고 하니 어리둥절해지기도 했다.





뢰머광장 풍경(좌측 모형)과 황제대관식 참석행렬圖(우측)


뢰머광장에는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있는 프랑크푸르트 시청사 등 중세시대 건물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대관식을 마친 황제는 가운데 건물 2층 테라스에 앉아 축하연을 열었다. 이 축하연에 참석한 사람이 5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2층 테라스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만 오를 수 있는데 프랑크푸르트 축구팀 소속이었던 차범근 선수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곳에 올랐었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구 시청사. 가운데 건물에만 유일하게 테라스가 있다.





대관식을 거행한 카이저 돔 성당은 어떤 모습일까? 황제를 선출하고 대관식까지 치른 성당이라 하니 대단히 웅장하고 내부 장식이 화려할 것 같았다. 내부수리 중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실망하기는 했지만 겉모습이라도 보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뢰머광장에서 카이저 돔 대성당으로 가는 골목길을 지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특별히 눈에 띄는 건물이 없는데 무슨 일일까 싶어 무리 속에 끼었다. 이런 독일어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려는데 해설사가 손가락으로 건물 지하를 가리켰다. 지하에는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놓은 건물의 잔해들이 보였고 곳곳에 안내문도 세워져 있었다.




지하로 연결되는 입구에는 KAISERPFALZ franconofurd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도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유산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안내문을 읽었다. 독일어와 영어로 된 긴 글을 대강 훑다 보니'군사들의 목욕시설...' 운운하는 내용이 보였다. 뢰머광장과의 관계가 연상되어 '내세울게 저리도 없어 로마 병사들의 목욕시설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나?' 하고 유구(遺構)의 성격을 속단해 버렸다. 유구들을 대강 살펴보고 카이저 돔으로 향했다. 내부수리 중이기는 했지만 입장은 가능했다. 성당은 생각보다 작고 내부 장식도 소박했다. 기대와 다른 소박한 성당에 실망했는지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 왔다. 시간이 이르기는 했지만 휴식을 취하려고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왔다.



카이저 팔츠 유구, 모형 및 상상도


피로가 풀리자 호기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카이저(Kaiser)는 황제를 뜻하는 말인데 병사들이 머물던 곳에 카이저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게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팔츠(Pfalz)는 독일어로 궁정을 뜻했다. 카이저 팔츠는 '황제의 궁정'이지 병사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프랑크푸르트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고 카이저 팔츠가 있던 자리가 황궁이었단 말인가? 낯설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프랑크푸르트였던 것 같지는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영주와 제후들에 의해 추대되는 선출직 임금이었다.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권을 가진 영주들을 선제후(選帝侯)라고 하는데 7명이 있었다. 이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않았다. 황제의 말도 잘 듣지 않았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힘 있는 영주들도 틈만 보이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물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황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기에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미약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황제는 황궁에만 머물 수가 없었다. 각 지역을 돌며 영주를 감시하고 달래며 국가를 통치해야 했던 것이다. 이때 황제가 일시적으로 머무는 궁전을 '팔츠'라고 불렀다. 팔츠는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인 12~30Km마다 세워졌다. 팔츠가 없는 곳에서는 주교가 다스리는 도시나 수도원에 머물렀다.    



윗줄 중앙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왼쪽 3 명은 성직 선제후, 오른쪽 4명은 세속 선제후, 아래 두 줄은 기타 제후들이다.


황제는 지정된 여정을 따라 이동했다. 이 일정표가 이티네라레(Itinerare)다. 오늘날 여행사에서 고객에게 주는 여행 일정표(Itinerary)의 어원이다. 황제가 1년 내내 전국을 순행하니 수도가 있을 리가 없다. 황궁도 없다. 신성로마제국은 황제가 프랑크푸르트의 카이저 돔에서 대관식을 하고, 뢰머광장에서 축하연을 연 다음 팔츠를 옮겨 다니면서 왕국의 법과 질서를 유지한 '유랑 왕국(流浪王國)'이었던 것이다. 카이저 팔츠 덕택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공부를 했다.



'카이저 팔츠'를 이해하고 나니 현장을 다시 보고 싶어 졌다. 아직 해가 남아 있어서 부리나케 호텔을 나섰다. 처음과는 달리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독일 여행을 하며 지나쳐 온 도시들 가운데 뷔르츠부르크, 로텐부르크, 뉘른부르크, 밤베르크, 쾰른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 카이저 팔츠가 있었다. 하나같이 '중세시대 건축물이 잘 보존된 곳'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던 도시들이다. 아쉬웠다. 진즉에 카이저 팔츠를 알았더라면 도시를 보는 눈이 달라졌을 텐데, 도시가 말하려는 것을 좀 더 많이 알아들었을 텐데….'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때처럼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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