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날씨마저 화창해서 광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발을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파 속을 걷는 것은 아무리 관광지라고 해도 짜증스러웠다. 문득 베네치아 시민들이 삶의 질이 떨어진다며 관광객들에게 거부감을 보인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그들을 먹여 살리는 관광객들을 싫어한다는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는데 많은 인파를 겪어보니 그들의 스트레스가 충분히 공감이 간다.
산 마르코 광장을 떠나 숙소로 향했다. 미로와도 같은 골목들을 이리 꺾고 저리 돌며 베네치아의 속살을 눈에 담았다. 다른 유럽 도시들처럼 베네치아에도 크고 작은 광장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꼭 우리네 시골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공터 같은 곳들도 많았다. 어디쯤인지 가늠도 안 되는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다. 무슨 행사라도 있나 하는 관광객 특유의 호기심으로 그쪽을 향해 발길을 돌리고 구글 지도를 켰다. 가까운 곳에 산 폴로 광장(Campo San Polo)이 있었다.함성은 그곳에서 나는 것 같았다.
광장이 가까워질수록 함성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소리에 맞춰 발걸음도 빨라졌다. 마치 다시 못 볼 기막힌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몇 차례나 골목을 돌고 나자 갑자기 앞이 확 트이면서 산 폴로 광장이 나타났다. 그리 크지 않은 광장에는 두 곳에 무리 진 사람들이 있었다. 광장에도착하자그들은 마치 나를 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와'하는 함성과 환호를 연이어 터뜨렸다.
도저히 궁금중을 주체할 수 없어 서둘러 다가가 보니 이미 온몸에 계란세례를 받고, 밀가루를 뒤집어쓴 젊은 여자가다른 남녀들에게서머리에 밀가루에 물과 술 등 각종 음료수 세례를계속해서 받고 있었다.그녀는 커다란 나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는데 나무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씨와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 그려진 종이가 붙여있었다. 그 앞에서 그녀가 커다란 소리로 뭔가를 얘기하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가 밀가루 등을 그녀에게 붓곤 했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에는 경악스러웠다. 아니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잠시 후 모습이 익숙해지자 혹시 그녀가 무당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우리나라의 서낭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복장도 일상복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의식을 위해 입은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그들의 의식(?)을 지켜보다 무속이나 종교의식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온몸이 엉망이 된 여자가 나무 앞에 쭈그리고 앉아 크게 외치면 또 누군가가 밀가루나 음료수 등을 퍼붓곤 했는데 그때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크게 웃는 등 환성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행위예술? 그러기에는 너무 가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집단 폭력인가? 하여튼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집단 폭력인지 행위예술인지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나무 앞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쓴 젊은 여자에게 사람들이 번갈아 다가가 물이며 밀가루 등을 퍼붓었다.그럴 때마다 여자는 광적으로 뭔가를 외쳤다. 그 광경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집단폭력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행위예술이거나 그들만의 놀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어서 사진을 찍었다. 이쪽저쪽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을 때 젊은이 하나가 다가와 내 핸드폰을 가리키더니 손을 내밀며 돈을 달라고 했다. 여러 사람이 사진을 찍었는데 유독 내게만 돈을 요구하는 게 석연치 않아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그는 짧은 영어와 이탈리어로 끈질기게 돈을 요구하다 내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돌아갔다.
궁금증은 저녁을 먹으면서 풀렸다.베네치아 건축대학 근처에서 식사를 하는데남자 둘이 다른 남자를 분장시키는 것이 보였다. 면류관을 쓴 예수의 모습이었다.대학 주변은고성을 지르는 젊은이들로난장판이었다.면류관을 쓴 예수도 그들 무리에 섞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밤이 깊어지고, 주변에 술병도 늘어가면서술이 과했는지 한 젊은이가 실례를 하자나머지 무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그에게로 몰려갔다.
이탈리어를 모르니그들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어웨이터에게 낮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물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짓들을 하는지 알아요? 그리고 저 친구들은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웨이터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1학기 수업이 끝나서 종강 파티하는 겁니다."
산 폴로 광장에서의 모습도,대학 앞에서의 광란도 다 '쫑'파티였다는 것이다.참 요란한 쫑파티였다. 요란한 쫑파티를 해야 할 만큼공부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었나? 우리나라 학생들은이런 정도의 쫑파티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출처 : 픽사베이
뉴욕타임스는 명문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자살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며 “고교 시절에 모든 게 완벽했던 최우수 학생들이 명문대 진학 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불안과 우울증을 겪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베네치아 건축대학도 건축분야에서는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던데 혹시 그들도 극심한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요란한 쫑파티를 하는 걸까?
우리나라 학생들도 이럴까? 하긴 이것도 젊은 시절에나 겪을 수 있는 일이겠지.짧은 학업 스트레스가 끝나면 더 치열한 생존경쟁 스트레스가 그들을 기다릴 텐데.... 아무쪼록 슬기롭게 극복하고 그들 모두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소원을 보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