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반 고개를 지나 후에로 향했다. 랑코 비치를 지나 20여분쯤 가니 도로 양편으로 'Bun Bo Hue'라는 간판이 달린 가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텔 직원이 후에에 가면 꼭 먹어보라며 알려 준 토속음식 이름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참으로 엉뚱하게 적용됐다. 후에 가는 길에는 다른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공동묘지가 자주 눈에 띄었다. 장례를 치르는 모습도 보였다. 색다른 풍경을 보며 베트남 전쟁 당시의 '후에 대학살'이 떠오른 것은 지나친 상상이겠지?
카이딘(啓定, Khai Dinh) 황릉에 도착했다. 혹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고도 한다. 카이딘 황제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의 12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916년부터 1925년까지 9년에 불과했다. 국민들은 "조국을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민중들은 프랑스에 착취당하고 있는데,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만 하고 있다."며 카이딘 황제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능은 1920년에 시작하여 1931년에 완성된 건축물로 바로크 양식에 중국 및 베트남 양식이 가미됐다고 한다. 무덤 같지 않은 이 건축물은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베트남의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카이딘 능 조감도
계성전(啓成殿). 카이딘 황제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황제의 신장은 150cm 정도로 관료를 뽑을 때도 자기보다 키가 큰 사람은 뽑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황제의 관은 동상 아래 18m 지점에 안치되어 있다. 황제는 능을 만들기 위해 후에에서 목조 군함과 죄수, 궁인들을 동원했고 수많은 풍수지리학자들의 의견을 받아 산의 경사면을 깎았다고 한다. 자기의 유택인 능을 짓기 위해 카이딘 황제는 정부 예산의 30%를 쏟아부었고 이로 인해 폭동까지 일어났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공사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황제의 동상 아래 18m에 관이 안치되어 있다
체구도 작았고 국민들의 사랑도 받지 못한 카이딘 황제는 무엇 때문에 자기의 능에 그토록 많은 집착을 했을까? 덕분에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여 베트남 국민들의 소득 향상에 작게라도 일조하고 있으니 죽어서나마 공덕을 쌓은 셈일까?
민망(明命, Minh Mang) 황제 릉으로 향했다. 응우엔 왕조의 두 번째 황제로 1820년부터 1841년까지 황위에 있었다. 1832년에는 미선(美山, My Son))에 있던 참파국을 병합하였다. 하지만 개국을 요구하는 프랑스와 갈등이 시작되어 식민지가 되는 빌미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민망황제릉 배치도
민망 황릉의 특징은 후에에 있는 황궁(Dai Noi)과 비슷하다는 점일 것이다. 카이딘 황릉이 서구적 건축을 바탕으로 중국과 베트남 양식을 가미한 것이라면 민망 황릉은 중국 양식으로 조성되었고 특히 정원이 아름다워 하루 종일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민망 황릉을 최고의 황릉으로 꼽기도 하는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민라우(明樓, Minh Lau), 황제의 휴게실
초승달 모양의 호딴응윁 연못 건너 민망황제의 무덤이 있다.
민망황릉. 담벽의 높이가 3m, 둘레가 285m에 이른다.
능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곳. 민망 황릉을 보고 호딴응윁(Ho Tan Nguyet) 연못을 건너오던 유럽인들 가운데 한 명이 나를 보며 "It's for you." 하며 연못을 가리킨다. 영문을 몰라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금붕어가 지천이다. 금붕어들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익숙해진 듯 인기척만 들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외국인이 다시 내게 말했다. "Totally for you." 그를 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웃으며 바라봤다. 민망 황릉이 가져다준 여유일까?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향강(香江, Perfume River)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티엔무 탑(天姥塔, Thien Mu Pagoda)으로 이동했다. 1601년에 건립되었으며 입구에는 19세기에 세워진 8각 7층 석탑이 있는데, 높이가 21m가 넘는 이 탑은 베트남을 대표하는 건축물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탑의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는 큰 거북의 등 위에 세워진 비석이, 다른 하나에는 2톤이 넘는 거대한 종이 자리 잡고 있다. 티엔무 탑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영모사(靈姥寺)가 있다.
향강(香江, Song Huong)
티엔무 탑 인근에는 응오딘 디엠 대통령의 불교탄압과 독재에 항거하여 분신한 틱꽝득(1897~1963) 스님의 차가 보관되어 있다. 경이로운 것은 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응오딘 디엠 정권이 붕괴되면서 베트남전이 시작되었고 스님은 불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았다. 분신 당시 틱꽝득 스님은 영모사(靈姥寺)의 주지였다고 한다.
1963년 6월 사이공에서 벌어진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
외세의 침략이 가중되고, 식민지배를 받으면서도 호화스러운 무덤 조성에 몰두했던 응우엔 왕조의 황제들. 만약 틱꽝득 스님이 카이딘 황제의 치세나 민망 황제의 치세에 부당함을 지적하며 소신공양을 했더라면 베트남의 역사가 달라졌을까? 티엔무 사원 앞을 흐르는 향강은 오늘도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