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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Sep 19. 2019

우직하기는

녀석은 언제 봐도 믿음직하다. 생긴 것도 나무랄 데가 없다. 겉모습만 그런가? 마음씨도 흠잡을 데가 없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어주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무겁다고, 힘들다고 짊어진 짐을 팽개치지도 않는다. 이만하면 충분히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주신(主神) 제우스가 녀석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아틀라스 대신 지구를 떠받치는 일을 맡겼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는 어울리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마치 녀석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자기와 비슷한 상대하고만 사귀고, 그런 친구마저 여럿을 두지도 않는다. 그뿐인가? 친구를 맺으면 죽을 때까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함께 하며 서로를 비난하지도 않고 둘이 합심하여 다른 사람을 흉보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으니 능히 군자라 부를 만하다.


녀석은 득도한 것 같기도 한다. 돌부리에 차여도 인상 한 번 쓰지 않는다. 진창에 온 몸을 더럽혀져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제 할 일부터 먼저 한다. 아무리 어렵고 더러운 일을 만나도 평상심을 잃지 않으니 득도한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때로 아무 잘못도 없이 낯선 사람에게 짓밟히기도 하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부당하게 구석으로 처박히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녀석은 아무런 항의도 불평도 하지 않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이라 해도 이만할까?



어느 경우에도 불평하지 않고, 단 한 번도 낯을 찡그리는 법이 없으니 녀석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내가 그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함께 하던 녀석을 어느 날 갑자기 뒷전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싫증이 난 것도 아니고, 더 매력적인 녀석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고지식함에 질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함께 할 일이 없어졌을 뿐이다. 그렇게 녀석은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 갔다.


오랜만에 작은 공간에 갇혀만 있던 녀석을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적지에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함께 하는 외출이라 어색해서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살펴봤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느낌은 발길을 옮길 때마다 점점 더 강해졌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신중하게 살폈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간이 좀 남아 낯선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보려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이런 맙소사! 녀석의 주변에서 피톨이 보였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녀석의 몸 여기저기에서 좁쌀보다 작은 알갱이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오는 동안 상처가 더 깊어진 게 분명한데 군소리 한 마디 없었다. 행여 내게 폐라도 끼칠까 두려워 티를 내지 않은 모양이다. 바보 같으니…! 부랴부랴 상처 부위를 테이프로 임시 조치하고 전문가에게 데려갔다.


전문가는 흔한 일이라며 “방법이 없어요. 포기하세요. 오랫동안 방치하면 이렇게 돼요.”라고 말했다. 황당했다. 녀석을 홀대하지도, 험하게 다루지도 않고 그저 오랫동안 보지 않았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오다니…. 녀석은 작은 공간에 갇혀 지내며 내가 외면하는 이유를 몰라 속앓이를 했던가 보다. 속을 끓이느라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는데 오랜만의 외출이 너무 기뻐 흥분했다가 피톨을 쏟아내며 산화한 게 틀림없다.




미안함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데 전문가의 말이 들려왔다. “오랫동안 신지 않고 놓아두면 밑창도 굽도 다 삭아서 부스러집니다. 어떤 구두라도 다 그래요.” 아틀라스보다 더 믿음직스럽게 내 몸을 지탱해준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영영 내 곁을 떠나버렸다.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좀 더 사려 깊은 주인을 만나 호강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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