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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Nov 13. 2021

별에게 닿을 마음

엄마가 된 지 8년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초보 엄마인 내게 막내 외숙모는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다. 소아과 의사인 외숙모는 아이의 가벼운 감기에서부터 정서적 문제까지 늘 걱정 투성이인 내게 전문적이면서도 푸근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 별일 아닌 것에도 종종거리며 걱정하는 내게,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된다고 다 잘 될 거라고 늘 따뜻한 확신을 주신다.


이런 외숙모도 한 사람의 엄마다. 셋을 낳았고, 둘을 키운다. 첫째는 열두 살 때쯤 하늘의 별이 되었다. 하지만 외숙모는 아직도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 때 이렇게 시작하신다. “나도 셋을 낳아서 키워 봤잖니”라고.


나도 엄마가 되기 전, 지금보다도 철이 없을 때는 외숙모의 아픔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십 년 넘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한 딸을 키우다가 병으로 떠나보낸 맘은 어땠을까. 아직도 집 안 한 구석, 사진과 촛불이 예쁘게 꾸며진 작은 탁자 앞에 홀로 앉아 매일 기도하는 맘은 어떤 걸까. 아이를 잃은 아픔을 견디지 못해 늦은 나이에 하나 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그 속내는 어땠을까.


별이는 (하늘에 있으니 별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동생이었다. 명절에 만나면 곧잘 어울려 놀았지만, 터울이 적은 여자 아이들치고 각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영특해서 동생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별이를 만나면 나도 좀 더 언니답게 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마음이 아픈 것은 나도 별이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별이 얼굴과 모습만 어렴풋이 맘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자정이 지난 시각에 집 전화가 울렸다. 엄마를 찾는 외숙모의 전화였다. 외숙모에게 우리 엄마는 시누이다. 시댁 식구지만 다른 사람보다 외숙모는 엄마에게 마음을 잘 털어놨던 것 같다. (나도 좋은 시누가 있어서 각별한 그 맘이 이해가 간다.) 나는 자다가 전화벨 소리에 깨서, 늦은 시간이라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엄마가 당황한 듯 조곤조곤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 응?”


나는 집안 어른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외숙모의 전화는 의외로 별이에 대한 것이었다. 별이가 아픈 것 같아 무슨 검사를 했는데, 큰 병이라고 한다. 일반인은 들어도 알기 어려운 병명. 아마 외숙모는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이미 직감한 것 같다. 본인이 의사니 얼마나 생존할 확률이 희박한지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한 그날, 마치 당장이라도 아이를 잃은 것처럼 통곡을 하며 소식을 전했나 보다. 그날 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끊은 엄마는, 설마 별이가 생사를 넘나들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직 어리니 금방 낫겠지. 치료를 잘하면 금방 건강해지겠지.


외숙모는 곧 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셨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소아암 전문가를 찾아 별이의 치료에 전념하셨다. 외삼촌도 그 먼 길을 자주 왔다 갔다 하셨다. 지금은 장성해서 결혼까지 한 별이의 남동생이 그때 한국에서 지냈는지, 미국으로 데리고 가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온 가족이 별이가 낫기만을 바라던 시기였다.


나는 철딱서니 없는 중학생이었지만, 엄마가 가끔 미국으로 국제 전화를 걸면 나도 옆에서 기다리다가 별이와 잠깐 통화를 했다. “언니가 별이 보러 미국으로 갈게, 어서 나아서 우리 디즈니랜드 가자.”라며 말을 건네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별이가 낫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도 의사고, 미국까지 가서 제일 좋다는 곳에서 치료를 받는데 못 나을 리가 없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와 통화할 때 별이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지금처럼 영상 통화가 가능했다면 별이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별이 목소리는 그저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응, 언니.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주말에 늦잠을 자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내 방에 들어와서 나를 깨웠다. “훈아, 별이가.. 죽었대.”


아직도 나는 그 ‘죽었대’라는 말의 무게를 잊지 못한다. 아파도, 혼수상태에 빠졌어도, 분명 생명이 존재하던 작은 몸에 결국 불씨가 꺼졌다는 말. 엄연히 존재하던 삶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는 말. 살아 숨 쉬던 나의 사촌의 존재가 그렇게 사라졌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도 차갑고 무거웠던 그 말의 느낌은 방금 들은 것처럼 생생하다.


친척들이 모인 모임에 가서도, 별이를 추모하는 미사에 참석해서도, 나는 감히 외숙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가 손님을 맞고 인사를 하는 모습이 껍데기만 남아 기계적으로 기능하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게다가 당시 외할머니는 많이 연로하신 데다 기억력도 많이 감퇴하신 상태여서 별이의 소식을 미처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친척들이 모여도 툭 터놓고 애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침통하고 어색하게 모여 있다가 헤어지곤 했다. 외숙모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어른들은 야속하게도 한참 지나서까지도 외숙모에게 간혹 ‘별이 엄마’라고 잘못 부르곤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외숙모는 무슨 기분을 느끼셨을까.


하지만 직감이란 것이 있어서일까. 얼마 후 외할머니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별이의 죽음을 눈치채셨다. 어느 날, 외삼촌을 붙잡고 갑자기 “별이는?”라고 물으셨단다. 외삼촌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아.. 어머니, 사실 별이가 많이 아파요.”라고 하셨다고. 외할머니는 더 묻지 않으시고 고개를 떨구신 후 한참을 우셨다고 한다.


외숙모가 어떻게 다시 지금의 쾌활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돌아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어마어마한 의지와 성숙으로 이루어낸 모습이라고 짐작하기만 할 뿐이다. 아들 하나가 남았던 외삼촌 부부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아기를 가지셨고, 결국 별이를 쏙 빼닮은 예쁜 딸이 태어났다. 그 막둥이가 자라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는 톡 튀어나온 이마와 야무진 입술이 별이를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한참 넋을 놓고 쳐다보기도 했다. 외숙모도 다른 아이 둘을 키우며 힘을 얻지 않으셨을까 하고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세월이 흘러 나도 엄마가 되었다. 몇 주 전 태어난 작디작은 신생아를 안아 젖을 물리며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엄마’라는 말이 주는 무게와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외숙모가 떠오른다.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면 한편으로는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꽉 찬 행복감이 느껴지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이에게 닥쳐올 미지의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진다. 내 삶에서 아이가 차지하는 덩어리가 커져 갈수록, 만에 하나 그 존재가 사라졌을 때 찾아올 암흑의 구멍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두렵다. 하지만 외숙모는 그걸 겪어 내고도 나처럼 부족한 엄마에게 ‘그래도 괜찮다’ ‘엄마로서의 삶은 소중한 거다’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신다.


세상을, 우주를 잃고도 견뎌낸 (그리고 견디고 있는) 외숙모 마음의 깊이는 아마 저 머나먼 우주의 별이에게 닿고도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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