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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02. 2022

전업주부는 잃는 것만 많다

전에도 글을 쓴 적 있듯이, 나는 반만 워킹맘이다. 


하루에 서너 시간, 그것도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사실 나의 일과는 전업주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전업주부들이 살림을 하는 시간을 좀 아껴서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하는 것뿐이다. 매일 청소를 꼼꼼히 하는 대신 청소 도우미를 부르고, 알뜰살뜰 발품을 팔고 요리를 하는 대신 배송과 반찬 서비스를 이용해서 시간을 아낀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경제력이 있다는 점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파트타임 일 말고도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일도 가끔 하기 때문에, '나의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집에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서 스스로 전업주부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글은 전업주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서 크나큰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 관한 글이 아니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상황에 휩쓸려 집에 머물게 되었다가, 다시 사회에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여성들에 관한 글이다. 회사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이 도무지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이 살림을 돌보며 진정한 보람을 느끼고 배우자 역시 그것을 바라는 경우는 이 글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전업주부의 삶을 경험해 보니, 전업주부란 정말 잃는 것이 많은 직업이다. 아니, 직업이라고 볼 수 있을까? 분명 많은 가치를 창조하고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일인데, 노력에 대한 대가를 금전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오묘한 위치에 있다. 물론 배우자가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먹고 입고 잠을 자지만, 가정을 건사하는 것 자체에 대한 대가를 따로 받는 것은 대개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집에 머무르며 전업으로 살림과 육아를 담당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있어 굉장히 고마운 일이다. 음식 냄새가 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집. 귀가하면 누군가가 나를 맞아주는 따뜻한 집. 그럼에도 항상 집에 있는 당사자는 괴롭다. 특히 집에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라면.



나의 경우 회사가 조직이 굉장히 작은 데다 시차도 있기 때문에, 거의 이메일로 일이 진행된다.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회사 동료도 두어 명에 불과하다. 업무적 네트워킹 같은 건 없다.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그 두어 명도 없었을 것인데, 업무 차원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그만큼 좁아짐을 의미한다.


물론 전업주부도 다른 전업주부를 만난다. 통상 엄마가 다른 엄마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만남은 직업 세계에서의 만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번듯한 명함이 없어서도, 정장을 빼입는 대신 집에서 입던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만나서도 아니다. 조직에 소속되어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고, 더 나은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끼리 순전히 공적인 영역에서 접촉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엄마들끼리의 만남은 삶과 육아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예의를 차리고 벽을 세워도 일단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학원이나 세일 정보를 나눈다고 해도, 그 정보만 쏙 빼먹고 자기 얘기 한 마디 없는 엄마는 얌체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약간 비하하는 의미로 "그 사람 직장생활 안 해봤지?"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만큼 사회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십 대 어릴 때야 신입으로 입사해 배우면 된다지만, 나이를 많이 먹고 새로운 직장에 도전하고 싶은 전업주부에게는 이처럼 치명적인 난관도 없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쌓이는 눈치와 일머리는 없고, 순진무구하게 의욕만 앞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전업주부들이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싶다. 학위나 자격증은 경험을 어느 정도 상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석사 학위가 있지만, 내가 살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어디 대고 자랑도 못한다. 집에 있다 보면 점점 두뇌 활동의 범위가 아이의 그것에 수렴하기 마련이다. (아이가 없는 전업주부는 어떤지 궁금하다.) 장시간 아이의 언어를 구사하며 아이의 일상을 함께 살아가다 보면, 사고하는 능력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러기가 싫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나와 비슷한 다른 엄마들과 시를 필사하고 온라인으로 북클럽을 한다. 이런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쓰는 직업을 가진 나의 배우자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는 고여 있는 물 웅덩이 같단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사회생활에서 얻어지는 유효한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자기 계발을 하는 게 도통 쉽지 않다.


엄마들이 잠깐 숨 쉴 틈이 생겼을 때 자꾸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래 서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고를 하기가 어려우니까, 톡을 주고받거나 인터넷 뉴스 검색처럼 1-2분 내에 손바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된다. 나는 아이를 돌볼 때 그나마 몰입이 쉬운 소설을 옆에 두고 들춰 보곤 했었는데, 그마저도 줄거리를 따라가기가 벅차져서 책을 손에서 한참 놓은 적도 있다.



전업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삶이 주는 커다란 기쁨은 분명 있다. 나는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일할 기회가 있다 해도 진심으로 아이들 곁에 있고 싶다. 나의 엄마가 그랬던 것이 내게는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선택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전업주부들의 마음 또한 잘 안다. 왜 '맞는 선택'을 했는데 수많은 것들을 잃어버려야만 할까.


외국에 살 때도 그랬고, 귀국을 한 지금도 그렇다. 주변을 둘러보면, 똑 소리 나는 영리한 전업주부들이 참 많다. 뒤늦게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사업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러 상황상, 이미 전업주부가 된 삶의 회로 안에서 빙빙 돌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하나둘씩 잃어버리다 보면 더 이상 무기 삼아 밖으로 나갈 밑천이 하나도 안 남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을 것이며, 사회적 차원에서도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여자들도 마음껏 나가서 일할 수 있도록 홍콩처럼 헬퍼 제도를 도입하면 좋겠다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친정 부모님이나 이모님의 도움을 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업 주부의 노동이 장시간 지속되어도 유효한 경력으로 쌓이기 어려우며, 너무나 중요한 직업인데도 우물 안에 고여 있을 수밖에 없는 신세라는 점이다.


다행히 요즘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되었. 집에서도 외부로 연결되는 통로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살림을 아무리 잘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말았을 텐데, 요즘은 살림도 기똥차게 잘하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수익을 벌어들이기도 는 세상인 것이다. 모두가 ‘떡상’을 하는 건 아니지만, 전업주부도 전보다는 사회에 뛰어드는 장벽이 조금은 낮아졌다. 또, 재택근무가 가능해지면서 나처럼 집에서나마 직장인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꼭 풀타임이 아니더라도 파트타임으로 할 수 있는 직장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자기 일을 이어 나가는 전업 아닌 전업주부들이 많아지면, 엄마끼리의 친목 도모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엄마들끼리의 네트워킹도 좀 더 보편화되지 않을까. 돈을 버는 것이 자아실현의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내 가치를 인정해주는 가장 보편적인 잣대가 돈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보살핀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전업주부들도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낳기 전, 아니면 결혼하기 전에 꿈꿨던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내가 이제 와서 뭘 하겠어'라는 생각만큼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도 없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시간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다. 그걸 스스로도, 남들도 다 인정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계속 전업주부로서 살아가든, 전혀 다른 일에 도전해 보든, 가능한 많은 경로가 생기고, 자기 일을 하는 다른 엄마들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집에서의 노고가 그저 '잃어버린 시간'으로만 남지 않도록. 



* 표지 이미지: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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