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Jul 20. 2022

공부 잘했던 사람들은 이래서 문제야

우리 집 둘째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재롱둥이 8개월이다. 


아빠가 아침마다 수동 그라인더로 커피콩을 가는데, 드르륵드르륵 소리에 맞추어 어깨춤을 들썩들썩 추며 꺅꺅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키우면서도 가끔 내 스트레스 지수가 천장을 뚫을 때가 있는데, 그때가 언제냐 하면 아기가 잠을 안 잘 때다. 아니, 안 잘 때가 아니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덜 잘 때다. 그러면 나는 대체 뭘 근거로 아이의 바람직한 잠 시간을 아느냐 하면, 그건 바로 공부를 통해서다. 



왕년에 공부를 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나도 학창 시절에 공부를 곧잘 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꽤나 방황하며 논다고 놀았지만, 그래 봤자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그래서 아마 내 주변인들은 내가 살아가는 일거수일투족에 아무래도 모험생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육아마저 모범생처럼 해 왔다. 아기가 잠을 잘 안 잔다? 일단 소아과 전문의의 의견을 구하고, 각종 소아과협회 웹사이트며 육아서를 섭렵해서 수면교육부터 시행했다. 첫째 때도 혼자서 잠이 들도록 수면교육을 시켰었는데, 아기의 수면 사이클에 대해 공부하고 방식에 대해 고민한 뒤 어렵게 수면교육을 시켜서 아기가 엄마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자기 침대에서 잠이 들게 되었다(이 과정도 엄청나게 다사다난했다..).

그 와중에 이 책 추천요..

뿐만 아니라 현재 월령에 맞는 잠 시간을 파악한 후, 대략적인 낮잠/밤잠 스케줄을 정해 놓았다. 그리고 휴대폰 앱으로 잠 시간을 트래킹하고 패턴을 파악하고 있다. 온종일 아무 일정이 없는 아기라지만 어느 정도 하루 일과를 정해 놓는 것이 아이에게도, 양육자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는 것도 육아서를 통해 배웠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경우 이 스케줄을 엄수하는 것이 '원칙'을 넘어서서 '집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기는 오전과 오후에 각각 1시간 20분 정도 잠을 자고, 저녁 7시-7시 30분에 잠자리에 눕히면 다음 날 새벽 6시경까지 자야 한다. (여기까진 좋다) 만일 이 스케줄을 지키지 못할 경우 머리에 뚜껑이 열리며 패닉이 시작된다. (그런데 거의 매일 이런단 게 문제)



스트레스에 골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어느 날 밤, 나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대체 왜! 나는 이렇게까지 아기의 잠 시간에 집착하는가. 생각해보면 8년 전, 첫째를 키울 때도 나는 모유에 집착했었고, 낮잠 시간에 집착했으며, 이유식 양에 집착했었다. 터울이 큰 둘째를 낳으며 내 마음도 어느 정도는 편안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동동거리는 나의 마음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긴 고민 끝에 하나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기의 잠 시간은 엄마의 육아 성취도의 잣대가 아니다. 


공부야 어느 정도 등락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하는 만큼 성적이 나온다. 그다지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벼락치기를 일삼았지만, 그래도 내일이 시험이라면 오늘만큼은 엉덩이를 붙이고 공부를 하곤 했다. 시험을 째고 도망갈 만큼의 배짱도 없었다. 그래서 아기도 그렇게 성실하게 키우면 좋은 엄마가 될 줄 알았다. 


육아가 참 어려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숭고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노잼'이라는 것이다. 왜 재미가 없냐 하면 아기가 볼 때마다 쑥쑥 크는 건 남의 눈에나 그렇고, 엄마가 보기엔 매일매일이 그냥 똑같다. 어제의 아기가 오늘의 그 아기다. 그 비슷비슷한 일상 속에 집안에 처박혀 말도 통하지 않는 아기와 종일 지내려니 보통 지루한 것이 아니다. 


집에 혼자 있으면 TV도 보고 책도 읽고 주전부리도 주워 먹을 텐데, 아기가 옆에 있으면 뭐 하나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영상물의 화면 전환이 두 돌 미만 영아의 두뇌 발달에 안 좋다는 얘기는 이미 너무 유명한 사실이 되어버렸고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책은 펼쳐 들면 아기가 들어다가 입에 넣으며 (안 찢으면 다행), 엄마 혼자 맛있는 걸 먹는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아기에게 6개월부터 초콜릿을 먹일 생각이 아니라면). 


고되지만 무료한 일상에서 모범생인 나는 나도 모르게 눈으로 재단할 수 있는 성취의 잣대를 찾았던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엄마들도 그럴 것이다. 분유량 몇 mL, 이유식량 몇 mL, 잠 몇 시간, 이런 "정량화된" 수치. 내가 사용하는 육아 앱은 하루의 잠과 식사 패턴을 그래프로 보여 주는데 (가로축이 최근 일주일, 세로축이 하루 24시간), 그걸 보며 어느 정도 일정한 패턴을 보이면 어찌나 마음이 평온해졌는지 모른다. 원래는 아무 때나 잠들던 아이가 딱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기 시작하자 그래프는 제법 규칙적인 줄무늬가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 자랑스러워 남편에게도 캡처해서 보여주고 육아일기에도 끼워 넣었다.

우리 아기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건 예시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육아의 또 다른 특성은 바로 '예측 불가능성.' 며칠간 완벽하게 똑같은 줄무늬가 생겨서 '이제 자리를 잡았구나'하며 기뻐하던 바로 그날, 아기는 이가 나든지 장염에 걸리든지 아니면 그냥 기분이 안 좋다는 이유로 20분씩 토끼잠을 자기 시작한다. 하루하루에 일희일비하면 안 되는데.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느긋하게 넘어갈 수 있는 배짱이 내겐 없었다. 


노잼과 예측 불가능성이 손에 손잡고 나를 압도하자, 나는 버둥대며 얄팍한 성취라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잘 하고 있다는 확신이 되어줄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적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그래도 아기가 잠을 잘 안 잔다고 육아의 실패자처럼 스스로를 닦달하는 짓만큼은 그만두었다. 눈에 보이는 성취가 있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몇 달 전 사진 속에 비해 팝콘처럼 커진 눈앞의 아기를 보면 눈에 보이는 성취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쭉 모범생처럼 아기의 연령을 따라가며 '바람직한' 육아를 하려 애쓰겠지만, 내 손을 떠난 부분에 대해서는 패기 있게 렛잇고를 외칠 수 있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마 난 렛잇고를 하는 것조차 책을 읽고 다른 엄마들에게 조언을 요청하며 모범생처럼 하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전업주부는 잃는 것만 많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