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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y 02. 2022

아이가 둘이 되면 엄마 사랑도 두 배가 될까

8년 가까이 아이를 하나만 키워 온 나는 항상 궁금했었다. 


아이가 하나 더 생기면 무슨 느낌일까?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모성애란 감정을 상상만 할 수 있듯이,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는 첫째 외에 다른 아이를 사랑하는 감정이 잘 와닿지 않았다. 주변에 아이 둘, 셋을 모두 정성으로 돌보는 엄마들을 보면서, 나는 '아이가 둘이 되면 엄마의 사랑이 두 배가 되는 걸까?'라고 내심 궁금했다. 


둘째가 생겨 뱃속에서 몽실몽실 태동이 느껴지고, 배가 남산만큼 불러올 때까지도 솔직히 내 관심사는 오로지 첫째였다. 첫째 아이가 받을 충격과 엄마를 빼앗겼다는 느낌이 걱정되어, 관련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도 많이 해줬다. 엄마에겐 항상 네가 1순위일 거라고 몇 번이고 속삭여주고,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돌아다녔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임에도 아직 통통한 뺨과 서툰 손놀림이 어찌나 아기 같아 보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지내던 작년 10월, 둘째가 태어났다. 아기를 낳고 입원하느라 첫째를 며칠 보지 못했는데, 첫애의 인생 중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밤에 자기 전에 뽀뽀를 해 주고, 일어나자마자 꼭 안아주던 나였기에 아이의 작은 마음에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심지어 진통 중에도 첫째 걱정을 했다.) 


아빠와 헬퍼가 든든히 옆을 지켜 주고 있었고, 친한 친구네도 놀러 가서 한참을 놀고 온 모양이었지만 나는 어서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주어야지, 하며 신생아를 데리고 귀가했다. 집에서 몇 시간 기다리니, 마침내 학교에서 다녀온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내 눈에 항상 아기 같던 첫째가, 무지하게 커 보였다. 


내게 달려와서 안기는 어깨도 단단하고, 머리도 엄청 컸다. 나란히 붙이고 앉은 다리도, 나를 감싼 팔도 길쭉길쭉했다. 게다가 남편이 말하길 지난 사흘간 엄마를 전혀 찾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도 첫째가 걱정되어 각별히 마음을 보듬어주려고 신경 쓰고 있었는데, 오히려 더 잘 지내는 것 같았단다. (엄마가 잔소리를 안 해서 그런가) 다 큰 아이를 아기처럼 보던 내 시선은 이렇게 하루아침에 뒤집혀 버렸다.


그에 비해 신생아는 너무나 조그맣고 연약했다. 잘 자는 아기 옆에서 나도 깜빡 옆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날 때마다, 조심조심 아기 코 밑에 손을 대고 숨을 쉬나 확인했을 정도였다. 젖을 먹고, 트림을 하고, 응가를 하고, 다시 잠을 자는 우리 둘째는 엄마 없이는 절대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엄마 없이도 씩씩하기만 한 첫째와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엄마의 관심과 에너지를 백 퍼센트 차지하던 첫째는 그렇게 둘째에게 엄마를 양보했다. 아이들 각각에 대한 사랑이 늘어나서 두 배가 되는 게 아니라, 그때만큼은 마음을 뚝 잘라 둘째에게 준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첫째가 신경이 안 쓰이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몸과 마음은 둘째에게 가 있을지언정, 걱정 보따리만큼은 첫째에게서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아이에게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소소하게 아이의 친구 관계며 학습, 정서까지 뭐 하나 맘이 놓이는 게 없다. 매일 밤 남편과의 대화에도 아기 얘기는 "잘 먹었는데 잠은 잘 안 잤어."가 전부지만, 첫째 얘기는 구구절절 끝날 줄을 모른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구상할 때도 있고, 의견이 맞지 않아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이를 악물고) "그그 으느르그(그게 아니라고)!" 하며 언쟁을 할 때도 있다. 


아이들을 둘 다 사랑하지만, 아이 각자가 마주한 인생의 단계가 너무 다르기에 사랑의 모습과 결도 그만큼이나 달라지는 것이리라. 

우리 집도 이런 모습이다. (이미지: Unsplash)



어제는 오랜만에 첫째와 단둘이 산책을 나갔다. 킥보드를 끌고 나간 아이는 오랜만에 하는 엄마와의 외출에 신나서 재잘거렸다. 둘째가 생기기 전, 둘이서 다니던 무수한 산책과 하이킹이 생각나서 가슴이 쓰라렸다. 둘째에게 정성을 들이고 나면 남은 마음의 깊이가 항상 찰랑찰랑 얕기만 해서, 첫째에게 퍼붓던 그때의 사랑이 그리웠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아이 뒤를 따라가는데, 아이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요리조리 잘 피해 가는 것이 보였다. 돌이켜 보니, 길에 요철이나 배수구 모서리가 길에 있을 때마다 나는 아이 킥보드 손잡이를 내가 잡고 불연속적인 부분을 피하게 해주곤 했었다. 킥보드 바퀴가 이런 부분에 걸려서 아이가 거꾸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던 것인데, 내가 아기 때문에 잠시 마음을 덜어낸 사이 아이는 능숙하게 알아서 잘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이 나오자 아이는 무거운 킥보드를 번쩍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엄마의 사랑이 둘로 나뉜 것이 아니란 생각이 그 뒷모습을 보며 들었다. 아이를 믿고 놔주는 것도 사랑이라는 생각. 몬테소리 교육으로 유명한 마리아 몬테소리도 그랬었다. 자기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과업에 있어 절대로 아이를 돕지 말라고. (Never help a child with a task at which he feels he can succeed.)


그러고 보면 둘째로 옮겨간 사랑만큼, 큰애에 대한 사랑도 크고 넓어졌다. 가슴에 매달린 아기 때문에 큰애 바로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여유가 없어지고, 대신 어른에게 하듯 존중하고 의지하는 새로운 마음이 생겼다. 둘째 때문에 너무 힘든 날은 첫째를 붙잡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엉엉 울기도 했다. 토닥토닥 나를 위로하는 아이의 손길이 마음 깊이 고마웠다. 


아이와 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놀이터에서 나란히 그네를 탔다. 오랜만에 아기 없이 가벼운 몸이라 나는 발을 힘껏 구르며 첫째에게 말했다. "엄마 그네 되게 높이 탈 수 있어. 이것 봐." 아이는 나를 보더니 자기도 열심히 발을 굴렀다.  


나도 높이 할 수 있어. 근데 시간이 걸려.


엄마도 그래. 시간이 걸리더라.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 사랑을 두 배로 늘리는 것. 너와 동생의 속도에 맞춰 그에 맞는 사랑을 주는 것. 모두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그래도, 엄마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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