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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Dec 12. 2022

오래도록 품었던 실패를 놔주는 법

좀 오만한 말이지만, 20대 중반까지 크게 '실패'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우리 언니에 비해서는 학업 성적이 특출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등수를 셀 때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자라진 않았다. 수능을 앞두고 친구들과 백일주를 폭탄으로 거하게 말아 마시고 죄다 토하고는, 그 길로 맘 잡고 공부를 시작해서 수능도 무지 잘 봤다.


그렇게 들어간 번듯한 대학교. 화려한 대학 생활이 끝날 무렵, 그 기세를 이어 누구보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남들이 "우와! 쟤 OO대 출신인데 2년 만에 OO고시에도 합격했대!"라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뭘 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반쯤, 남들이 말하는 탄탄대로를 걷고 싶은 허영심이 반쯤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험공부.

2년 반 동안 내 모든 걸 쏟아부었고, 결과는... 실패.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기억에 생생하다. 저녁 6시 정각이 되면 합격자에게는 문자가 간다고 해서, 일부러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엄마와 어딘가 외출한 뒤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5:59. 엄마 품에 기대서 5분 정도 기다렸다. 휴대폰은 야속하게도 잠잠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커트라인 총점까지 1점 이내의 차이였다.  


인생 첫 실패였다.



고통과 좌절의 깊이를 함부로 비교할 순 없지만, 내가 겪은 실패가 남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엄청난 일이 아니었단 건 그때도 알았다. 큰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자라던 온실 속 화초가 고작 2년 반 공부하고 실패를 운운하다니.


하지만 그 시절 내게는 그 실패의 그림자가 너무도 크고 진했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옮기기까지도 12년이 걸렸다. 항상 그때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쓰라리고 아파서 도저히 글이 나오지 않았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있고, 향후 내 인생의 굴곡을 바꾸어주는 변곡점이 되었던 사건이지만, 생각이 멋대로 뒤엉켜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특히 초반 몇 년은 황금 같은 이십 대 몇 년을 잃어버렸다는 불안감이 너무 심했다. 남들은 취직해서 2년, 3년 일을 하고 ‘경력직’으로 이직을 할 만한 시간에, 나는 검고 깊은 블랙홀에 내 시간을 쏟아부어 버린 것 같았다. 누가 내게 이 공백을 설명하라고 할까 봐 두려웠고, 다시 앞날을 고민하는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어떤 종류든 실패를 겪은 사람이 있다면 이런 불안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지 않을까.


오늘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백지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이제 쓸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꽁꽁 품어 왔던 나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실패를 극복하는 법'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일 순 없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일생일대의 노력과 소망을 쏟아부은 결과가 좋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다시 도전할 것인지 정해라. 미련이 남지 않도록. 

나의 경우는 한 가지는 쉬웠다. 시간 틀을 정해 놨었고, 진짜로 한 톨의 후회도 남지 않을 만큼 전력을 다했다. 결과 발표가 나기도 전에 박스 가득 채운 노트며 교과서를 일부 갖다 버릴 정도였으니까. 더 열심히 할걸, 이라는 가정 자체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래서 딱 한 번만 다시 해볼까?라는 유혹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회가 남지 않았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게 참 슬펐다. 그 길이 내 길이 맞다고 너무도 확신했던 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처럼 눈앞이 깜깜했다. 농담처럼 '지긋지긋한 연인과 죽도록 사랑하다가 헤어진 것 같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어쨌든 후회나 미련 없는 순수한 슬픔과 패배감에 젖어볼 기회가 되었다.  


그러니 첫 단계는 이것이다. 다시 도전할 만큼의 미련이 남는지, 정말로 최선을 다했는지 냉정하게 판단하기.


2. 무조건 밖에 나가라, 활동해라.

다시 도전할 것이 분명 아니었기 때문에 씁쓸하긴 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긴 쉬웠다. 다행히 대학교 이름과 토익 점수는 간판이 되어 주었고, (당시에는 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노처녀같이 느껴졌지만) 아직 젊었다. 닥치는 대로 나 자신을 홍보하고 다녔고, 알바든 취업 면접이든 가리지 않고 봤다.


강남 큰 영어학원에서 영어 강사도 해 보고, 어린이 교구 개발 회사에서 면접도 봐 보고, 손을 움직이며 잡념을 없애려고 미술 학원도 다녔다. 감사하게도 공부하는 동안 금전적으로 전폭 지원해주셨던 부모님이 계셨기에 돈 스트레스는 없었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쓰는 건 커다란 에너지를 주었다.


억지로라도 스케줄에 맞추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파워 E 성향인 나에게는 약이 되었던 것 같다. 어쩌다 그 자리에 갔는지, 그전까지는 무슨 일을 했는지 질문을 받을 때는 울컥하며 씁쓸함이 밀려왔지만, 웃으며 잘 넘기는 법도 터득했다. 어쨌든 밖이었으니 울 순 없지.


3.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찾아라.

돌이켜 보니, 씁쓸함을 딛고 이렇게 외부로 나갈 수 있던 것은 사실 부모님의 덕이 컸다. 패배 의식에 젖을 수도 있는 시간에 부모님 덕에 내 자존감은 지켜졌다. 나의 감정만도 힘겨워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 아빠도 내가 불합격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노는 걸 좋아하고 뭐든 백 퍼센트까지는 하지 않던 둘째 딸이 그렇게까지 모든 걸 쏟아부어 공부하는 걸 바로 옆에서 보셨으니. 그래서 시험에 떨어졌을 때, 내심 속이 많이 상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부모님은 나의 노력을 진심으로 알아주셨고, 위로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 시간이 언젠가는 빛을 발하리라고 믿어 주셨다. 그렇게 말을 해주셔서가 아니라, 그냥 느껴졌다. 시험 합격 여부와 나의 가치는 전혀 무관하다고, 나의 2년 반이 나를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들어줬다고 정말 믿으셨다.


“결국 모든 사람의 인생을 장기적으로 보면, 타이틀이 아니라 됨됨이대로 산단다.” 아빠의 말씀.

“이걸 해 냈는데 네가 앞으로 뭔들 못 하겠니.” 엄마의 말씀.


내 안의 폭풍 같은 괴로움을 백 퍼센트 이해받긴 어려웠지만, 적어도 내겐 든든한 내 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는 실패했을지언정 실패자가 되진 않을 수 있었다.


4. 객관화시켜라, 가볍게 여겨라

불합격 통보를 받은 그 여름, 고모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고모는 미국으로 시집을 갔는데, 고모부는 한국계 미국 교포시다. 아주 가끔밖에 만난 적이 없기는 하지만 처조카도 아주 예뻐하는 다정한 분이셔서, 나는 고모부를 만나 나도 모르게 나의 괴로움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당시 면접을 보았던 곳 중 오퍼가 들어온 직장을 다닐 것이냐가 주로 고민이었다. 백 퍼센트, 천 퍼센트 내 길이라고 확신이 들었던 시험에도 실패했는데, 이 회사가 과연 내 길이 맞는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했다.


고모부는 가만히 들으시더니, “한 번 해 보면 어때? 들어보니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라고 하셨다. 나는 “막상 다녀 봤는데 별로면 어떡해요? 제 길이 아니면 어쩌죠?”라고 바로 대꾸를 했다. 고모부는 웃으셨다. “한 번 해보고, 아니면 새로 찾아보면 되지.” 


내 어깨를 짓누르던 고민은 시지프스의 돌덩이 같기만 했는데, 고모부는 세상 가볍게 말씀하셨다. 나를 신경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로 마인드가 그랬다. 일단 합격할지 아닐지 모르는 시험에 2년 반을 투자한 것부터가 고모부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는데, 그 2년 반이 공백으로 남아서 내 발목을 잡는다는 것 또한 말도 안 된다고 여기시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어때? So what?”


그런데 그 대화가 그렇게나 내게 해방감을 줄 줄은 몰랐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벽에 부딪칠 때마다 고모부의 말을 되뇌었다. 나한테는 세상 심각해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해 보고 아니면 다른 길이 있겠지. 요즘은 한국에서도 예전보다는 다양한 진로가 있고, 사업이나 시험 준비를 하다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일이 흔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한국 사회는 좀 더 경직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갔다가 공부를 하고 직장을 잡은 것도, 나이와 커리어 공백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문화에 크게 매력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는 공백이 시커먼 굴처럼 커 보여도, 한 발짝만 떨어져서 조망해보자. 별 것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 다독여보자.


5. 뭘 얻었는지 생각하라. 그렇다고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을 해 봤다면, 결과와는 관계없이 분명 남는 게 있다. 불합격 당시에도 그걸 알긴 했지만, 오히려 ‘나는 이렇게나 준비가 되었는데 왜 안 됐을까’라는 생각만 들었었다. 하지만 패배감이라는 감정은 점차 사라지게 마련. 대신 내가 쌓은 실력은 그대로였다. 공부했던 내용은 잊어버린다 해도, 노력한 경험은 그대로 내면에 남아 나를 단단하게 해 준다.


그리고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하면 되지’라는 다소 오만한 마음은 겸손으로 바뀌고, 비슷한 경험을 겪은 친구에게 진정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내공도 쌓였다. 인생의 장애물을 겪는 타인을 노력의 부재로 재단하지도 않게 되었다. 잃은 것이 있다면 얻은 것도 있다는 걸 어렵게 배웠다.


 따지고 보면 잃은 것 중 아주 큰 부분은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좀 잃어버려도 괜찮다.   


6.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시간은 약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패배감과 씨름하던 시간이 지나고, 내가 꿈꿨던 직업을 가진 사람이 TV에 나와도 무덤덤해지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며 뾰족했던 마음의 상처도 점점 모서리가 동글동글해진 것이리라. 12년 전,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려울 만큼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나의 실패는 이제 아주 가끔 품 속에서 꺼내 보는 낡은 사진처럼 변했다.


실패와 고통을 겪는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말. 시간이 약이다.


대신 품 속에 꼭꼭 숨겨 왔던 실패를 꺼내서 날려 보낼 수 있으려면, 시간만 보내면 안 된다. 무엇보다 현생에 충실해야 한다. 내 경우도 열심히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뭘 해도 열심히 했고, 큰 실패를 해봤기에 작은 실패는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이렇게 과거의 아픔을 글자로 흘려보내는 날도 왔다.


‘가지 않은 길’이 어땠을지 이제는 곱씹어 보며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 단계도 어느덧 지났나 보다. 대신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며, 향후 내게 닥칠 크고 작은 다른 실패에 대비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가 오래도록 품었던 실패를 보내주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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