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귓구멍이 막혀버렸다는 사실을...
"너 귓구멍이 막혔니?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할 때의 그 귓구멍 말고, 귓불에 뚫은 귀고리용 귓구멍이 막혀 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귀고리를 너무 오랫동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는 외출할 일이 없어서,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입덧으로 누워만 있느라, 그리고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쥐어뜯는 아기 때문에 귀고리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귀고리는 (이제 전생처럼 여겨지는) 아가씨 시절부터 나의 최애템이었다. 길거리표부터 백화점표까지 깨알같이 모으곤 했었다. 눈 오는 날엔 눈꽃 모양 귀고리를, 여름밤 칵테일 약속에는 양쪽이 비대칭인 별모양 귀고리를 하고 외출할 때는 달랑거리는 장신구만큼이나 내 마음도 설렜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귀고리를 많이 처분하기는 했어도 내가 아끼는 예쁜 반짝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귓구멍이 막히다니.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이제 이 장신구들은 그냥 관상용이 되어 버렸구나.
(다시 뚫을 겁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무리 귀중한 것이라도 쓰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이 속담을 통해 가르쳐 주신 지혜다.
그리고 이렇게 귀고리 얘기를 구구절절한 것도 사실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아주 소중하고 깨끗한 구슬(재생 에너지)이 잔뜩 생겼는데, 꿸 줄이 없어서 (또는 귓구멍이 막혀서) 집에 모셔만 두었다고 하자. 얼마나 억울한가? 예쁘게 꾸미고 나가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데 말이다.
기후변화 때문에 화석연료를 써선 안된다는 건 이제 삼척동자도 안다. 태양이나 바람 같은 자연의 힘을 이용하면 깨끗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단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무리 풍력 발전기를 빙글빙글 돌리고 태양광 패널을 사방에 설치한들, 거기서 생산된 전기를 정작 쓰지 못한다면? 재생 에너지 설비를 마련한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리 많이 생산한다 한들
왜 쓰지 못하냐고? 전기를 생산하는 건 저기 멀리 있는 발전소고, 전기를 사용하는 건 바로 여기 우리 집이기 때문이다. 전기가 날개가 달려 나한테 와 주면 참 좋겠지만, 현재 전기는 송전망과 배전망을 통해 각 가정으로, 사무실로, 가게로 들어온다. 구슬을 한 곳에서 잔뜩 만들어 이 아이, 저 아이 나누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화력발전소에서 대규모 발전을 할 때는 사실 전력망의 문제가 지금보다는 간단했다. 구슬을 언제 몇 개 만들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발전소에서 잔뜩 전기를 생산한 뒤 전국 방방곡곡에 촘촘하게 퍼진 전력망을 통해 전력을 공급하면 되니까. 그리고 대한민국은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이 경제를 견인하여 왔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안정적인 전력망 인프라를 제어하고 유지해 왔다. 한전이라는 중앙 집중식 거버넌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전력 시장 구조 역시 산업체에 유리하도록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깨끗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재생 에너지 비중이 증가하며 공급의 예측이 어려워졌다. 구슬을 여기저기서 만들게 되었는데, 몇 개 만들지 도통 미리 알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양이나 바람은 기존 연료에 비해 정확한 공급량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날은 해가 쨍쨍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구름이 껴서 발전량이 적고, 어떤 날은 바람이 예상보다 너무 거세서 전기가 엄청 생산되기도 한다. 발전량 자체가 급변하다 보니 통제가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간헐적으로 생산되는 재생 에너지는 에너지저장장치(ESS)가 붙어 있기 때문에 제어해야 하는 범위가 예전보다 넓어졌다.
공급량이 적으면 몰라도 많은 게 뭐가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급량이 과도해도 문제가 된다. 주파수와 전압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발전량이 들쭉날쭉하면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로 '전력 계통의 안정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제주도에서 풍력 발전을 너무 많이 해서 정전이 날 뻔한 적도 여러 번 있다. 구슬을 마구잡이로 만들어 놓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것과 다름없다.
태양광과 풍력은 그래서 예쁜 구슬을 생산해주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끈에 꿰어주지는 못한다. 심지어 태양광의 경우 계절마다 차이가 너무 크다. 독일에서는 몇 년 전에 12월보다 6월에 재생 에너지 생산이 무려 10배나 되어서, 체코 등의 주변국으로 부랴부랴 송전했는데 계통의 안정성을 해치는 바람에 욕만 실컷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줄에 꿰지 않은 구슬을 갑자기 냅다 집어던졌다고 생각하면 욕먹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공급이 과도하면 소비를 일부러 증가시켜 전력망의 균형을 유지하기도 한다.
어떻게 꿸 것인가
이번 여름도 벌써 지구 곳곳에서 폭염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인구가 늘고 생활 수준도 높아지며 전 세계에서 가동되는 에어컨도 점점 늘어만 간다. 폭염과 전력 수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란 뜻이다. 전기를 많이 쓰면 전기세도 문제지만 (우리 가족도 작년에 아기를 핑계로 에어컨을 많이 틀었는데, 여름 관리비 고지서를 받아 들고 '과연 이 숫자가 잘못된 걸까, 내 눈이 잘못된 걸까'라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크나큰 문제다.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화석연료와 작별을 해야 하는 시점에 신재생 에너지만으로 안정적인 전기를 공급할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덩치의 중국은 최근에 구슬을 많이 만들고 있다. 올해 첫 5개월 동안에만 재생 에너지 설비를 10 퍼센트나 늘렸고, 특히 태양광 설비 증가가 38%로 두드러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구슬을 만드는 것일 뿐, 실제로 꿰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꿸 구슬조차 없는 것보다는 구슬을 많이 만들 수 있는 설비 용량을 늘리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긴 하다. 하지만 꿰지 못하면 그 많은 구슬은 소용이 없다. 아직은 여름철 전력 수요 대비를 위해 가스와 석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라, 잘 꿸 수 있는 방안을 더 고민해 봐야 한다.
다행스러운 소식도 있다. 최근 39도까지 치솟은 텍사스에서는 사상 최대의 전력 수요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재생 에너지원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했다는 기사가 났다. 이런 식의 경험이 쌓이면 앞으로도 전력 수요가 더 많아져도 재생 에너지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구슬을 꿰는 아이디어 중 이런 것도 있다. 기후변화 대응에 나서면서 오래된 석탄 화력발전소들은 점차 이용을 중단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발전소들은 이미 전력망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재생 에너지원을 여기 연결하면 따로 송배전선 인프라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구슬을 꿸 실이 이미 있으니,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꿰서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지만, 기존 탄소 경제에서 사용하던 것을 재활용하면 자원도 돈도 아끼고 참 좋을 것이다.
탈탄소 미래로 나아가는 건 이렇게 어렵다. 구슬도 만들어야 하고, 실도 구해야 하고, 꿰어야 하고,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방향임은 틀림이 없다.
….아무튼, 귀 다시 뚫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