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니 사실 중학교 때까지) 안고 자던 애착 인형은 팬더곰 인형이었습니다. 아직도 친정집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저의 팬더곰은 이제 너무 낡아서 너덜너덜해졌지만, 또랑한 눈빛만큼은 예전과 같아서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요즘 한국 유일의 판다 가족, 바오 패밀리에게 푹 빠졌습니다. 철푸덕 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이나, 자기 새끼를 예뻐하며 젖을 먹이는 모습 등을 보면 '얘네 사실 사람 아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만큼 매력적이죠. 사실 예전부터 느꼈는데, 판다는 사실 멸종되기 딱 좋은 동물 같아요^^;;; 일 년에 가임기가 3일이라니, 장난하나요? 영양분 없는 대나무를 주식으로 삼는 바람에 하루종일 밥을 먹어야 하는 동물이라니. 게다가 새끼는 또 얼마나 작은지요. 자연 상태에서 이 미숙아를 성체로 키워내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판다는 인간의 도움으로 번식에 성공하고 있고, 덕분에 멸종위기종에서 벗어났습니다. (여전히 취약종이긴 하지만요) 인간의 간섭이 판다에게만큼은 도움이 된 셈이지요. 귀엽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판다가 멸종되지 않아서 다행인 이유는 또 있습니다. 되도록 다양한 종의 생물들이 지구상 존재하는 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생물다양성(biodiversity)'라고 하는 우리 지구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생태계는 그 자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거든요.
다양성은 왜 중요할까?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러워했던 과거와는 달리, 한국도 이제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종이나 민족뿐만 아니라, 가치관이나 정체성 등이 획일적일 필요가 없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단 거죠.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각 개인의 독특함이야말로 축하해야 할 가치라는 건데요.
다양성이 소중한 건 인간 사회뿐 아니라 건강한 생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꿀벌과 나비가 필요한 것처럼, 동식물과 미생물은 서로 물고 물리는 순환 속에 균형을 이루고 있거든요. 꽃과 벌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메커니즘도 있지만, 사실 잘 모르는 게 훨씬 많다고 해요.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생물종 중 인간은 겨우 1/10 남짓 파악할까 말까라고 하니까요. 인간이 아무리 깝쳐(?) 봤자, 오랜 시간 지구에서 진화하며 살아남은 다양한 생명체들의 조화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죠.
자연스러운 멸종은 당연하지만..
물론 생물다양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 어떤 종도 멸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멸종할 종은 멸종해야 그게 균형에 맞는 거죠. 판다도 만일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멸종했다면 가슴이야 찢어졌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40억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구에서는 5번의 대멸종이 일어났고, 마지막 대멸종 때는 공룡을 포함해 무려 75 퍼센트의 동식물이 멸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멸종 덕에 지구상에는 현재와 같은 포유류가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후 위기의 시대가 오자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지구의 기온 변화나 동식물의 멸종은 원래 아주 느리고 점진적으로 일어났었습니다. 태양의 복사력이 조금씩 변하거나 지구 환경이 변하며 수천 년, 수만 년, 수억 년 동안 아주 천천히 일어나던 변화였죠.
그런데 지금 일어나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파괴는 100-200년 사이에 갑자기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인위적인 활동 때문에 초래된 일이죠. 원래는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종은 사라지고, 다른 종은 생겨나고 하면서 균형을 맞춰가고 있었는데,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 탓에 새로운 종이 출현하기도 전에 많은 종들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937년 불과 23억 명이었던 인류의 인구는 2020년 무려 78억 명으로 점프를 했고, 66%였던 미개척지는 35%로 뚝 떨어졌습니다. 인간이 토지를 경작하고 목재를 이용하며 동식물의 서식지는 사라지고, 생태계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뿐인가요? 탄소 배출이 대기 중에 차곡차곡 쌓이며 기온이 올라가자, 특히 고착 생활을 하는 종들은 살 수가 없어집니다. 한반도의 기후에 정착해 살던 종을 갑자기 적도로 옮겨 버리면 살 수가 있겠어요?
파악하기도 어려운 생물다양성 훼손
전 세계에 척추동물이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인 Living Planet Index (LPI)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6년까지 척추동물 개체 수는 평균 68%나 감소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이는 지역마다 편차가 심해, 아래 표를 보면 남미 쪽은 처참하단 걸 알 수 있어요. 특히 양서류와 파충류, 어류의 개체 수 감소가 심각하다고 하는데요.
근데 이거는 '척추동물'만입니다. 모든 동식물이 아니고, 미생물도 아니고요. 그만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 무지하단 거죠. 그나마 아는 걸 좀 헤아려 봤더니 이 정도란 겁니다. 매년 곤충의 1-2%가 사라지고 있고, 매일 12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기는 하지만, 딱 수량화해서 말하기 어려울 만큼 아직 우리가 아는 건 많지 않습니다. (예외는 모기인데, 기온이 올라가며 모기는 더더욱 번성하고 있으며 더 다양한 병을 옮긴다고 합니다... 하하... ㅆ...)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직도 인간은 그 폐해의 깊이를 가늠하지도 못한 채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를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를 막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사람들이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합니다. 기후변화와 마찬가지로 UN 프레임 안에서 체결된 "생물다양성 협약(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 CBD)"이란 게 있는데요, 한국도 물론 가입되어 있습니다. 작년에는 이 협약의 당사국 회의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는데, 다행히 여태까지 논의된 것에 비해 가장 적극적인 수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해요.
뉴스를 찾아보니 "2030년까지 지구상의 육지와 바다의 30%를 보호지역으로 지정하고, 훼손된 생태계를 최소 30% 복원해 외래 생물 종의 적극적인 관리와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한 재원 확보" 등이 의결되었다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생물다양성 보존에 돈을 많이 쓰겠다 이겁니다. 90년대부터 이전까지 보다 멸종 속도가 50-100배나 빨라졌다고 하니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겠죠.
환경 파괴, 기후 위기, 그리고 생물다양성의 훼손.. 이런 것들이 각자 다른 곳에 방점을 찍고 있을 뿐, 사실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구상의 자연환경이며 에너지 자원, 다채로운 동식물들은 모두 인간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죠. 그 위기의 끝이 결국 인간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판다의 멸종을 구했듯, 인간 자체의 멸종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일 겁니다. 기후 위기를 해결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셈이죠.
푸바오를 부탁해, 인간을 부탁해!